자 동 로 그 인 :
 
 


658, 1/33
   노희담
   감사로 인한 행복 (창49:29-33)


  2018년 10월 31일, 독일 교포 남성 A 씨가 파란 눈의 노부부와 함께 광주 남부경찰서 현관문을 쭈뼛거리며 들어왔습니다. 한국말을 전혀 하지 못하는 A 씨는 자신을 돕던 모 사회복지법인 원장을 통해 딱한 사정을 경찰에 설명했습니다. A 씨는 1983년 3월 광주의 한 병원에서 누구의 축복도 받지 못한 채 태어났습니다. 당시 18살 미혼모였던 A 씨의 어머니 B 씨는 임신 사실을 알고 절망에 빠졌습니다. 어린 나이에 혼자 아이를 키울 자신이 없었던 B 씨는 아이를 지우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다 미혼모 지원 시설 관계자의 끈질긴 설득으로 해외 입양을 결정했습니다. 세상에 나오지 못할 뻔했던 A 씨는 어머니의 품에 한 번도 안겨보지 못한 채 먼 이국땅으로 떠나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35년의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양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친모에 대한 그리움이 눈덩이처럼 불어났습니다. A 씨는 그 그리움 하나로 양부모님과 함께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안준석 경위 등 남부서 실종전담팀은 자신들이 담당하는 업무가 아니었지만, A 씨의 딱한 사정을 모르는 척할 수가 없었습니다. 팀원들은 실종 사건을 해결하던 노하우를 십분 활용해 친모 찾기에 나섰습니다. A 씨가 태어난 병원 원무과 자료와 입양 당시 작성됐던 입양카드, 경찰 정보망의 신원조회 등 단서가 될 만한 모든 자료를 샅샅이 뒤졌습니다. 어렵사리 B 씨가 사는 곳을 찾아 B 씨를 만나는 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B 씨는 냉정할 정도로 단호하게 A 씨 만남을 거절했습니다. 현재 가정을 꾸리고 화목하게 살고 있는데, 가족들이 입양 사실을 알게 되면 큰 충격을 받을 거라는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피는 물보다 진해서였을까요. 경찰이 다녀간 그 날 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B씨는, 다음 날 마음을 고쳐먹고 A 씨를 만나기 위해 경찰서를 찾았습니다. 귀국을 준비하다 경찰의 연락을 받고 한걸음에 달려온 A 씨를 본 순간, B 씨는 앞으로 쓰러지듯 무릎을 꿇고 “미안하다”며 오열을 터트렸습니다. A 씨는 그런 엄마의 두 손을 말없이 꼭 잡아주었습니다. 이 과정을 모두 지켜본 안 경위는 “과정은 어려웠지만 두 사람이 상봉해 묵은 상처를 치유한 것 같아 뿌듯한 마음”이라고 말했습니다.

  A 씨와 같이 해외로 입양되어 양부모와 같이 잘 살다가, 뒤늦게 친모를 찾아 한국으로 오는 사람들이 꽤 된다고 합니다. 그중에는 A 씨처럼 성공하는 경우도 있지만 실패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들은 왜 자신을 버린 친모를 찾으려 할까요? 어떤 심리학자는 엄마의 배 속에 있을 때 느꼈던 최상의 편안함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 편안함은 세상에 태어나서 어떤 상황에서도 느낄 수 없는 최고의 기분이라는 겁니다. 프로이드는 그것을 ‘대양감(oceanic feeling)’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대양감이란 태평양과 같이 넓고 큰 바다와 하나인 듯한 황홀한 느낌을 가리킵니다. 사람은 누구나 무의식에 그 대양감 곧 최상의 편안함에 대한 기억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그리움은 비단 해외 입양아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마음에 품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아들 열두 명 하나하나에게 알맞게 유언을 전한 야곱이 말했습니다. “나는 곧 세상을 떠나서 나의 조상들에게로 돌아간다.” 그리고는 조상들이 묻힌 곳에 자신을 묻어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얼마 전에 요셉에게 자신을 이집트에 묻지 말고 조상들이 묻힌 곳에 묻어달라고 말했습니다. 요셉이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자 맹세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리하여 요셉의 맹세를 받아냈습니다. 그런데 지금 열두 아들 앞에서 다시 조상들이 묻힌 곳에 묻으라고 말한 것입니다. 야곱이 얼마나 조상들이 묻힌 곳에 묻히기를 바라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야곱만의 특별한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이런 모습을 가끔 보게 됩니다. 외국으로 이민 가서 잘살고 있는데, 죽으면 꼭 조국에 묻히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겁니다. 이는 어떤 심리의 반영일까요? 그것은 해외 입양아가 엄마 배 속에 있을 때 느꼈던 대양감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친모를 찾는 것과 비슷한 성격을 지닙니다. 그와 비슷한 성격의 그리움을 조국에 대해 느끼는 겁니다. 그래서 조국 땅에 묻히기를 바라는 겁니다.

  그런데 엄마 배 속에 대한 그리움이나 조국 땅에 대한 그리움보다 더 근본적인 그리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혼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입니다. 엄마 배 속에 대한 그리움이나 조국 땅에 대한 그리움이 육적인 뿌리에 대한 그리움이라면, 영혼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영적인 뿌리에 대한 그리움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영적인 뿌리인 영혼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품고 있습니다. 곧 태곳적 자신이 떠나왔던 곳에 대한 그리움이 있다는 겁니다. 그 그리움의 원인은 태곳적 그곳에서 누렸던 완전한 평화로움이라고 합니다. 물론 그 평화로움에 대한 기억이 의식에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의식에는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영혼의 고향을 그리워한다는 겁니다.

  프로이드는 대양감을 태아일 때뿐만 아니라, 살아가면서 종교적 절정 체험 등을 통해서도 느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살아가면서 느끼는 대양감은 우주와 하나라는 의식 혹은 하나님과 하나라는 의식에서 비롯된 절대적 평화의 느낌입니다. 그러니까 육적 뿌리에서 경험한 대양감 때문에 해외 입양아가 친모를 그리워하고, 영적 뿌리에서 경험한 대양감 때문에 누구나 영혼의 고향을 그리워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야곱이 죽었을 때 성경은 “조상들에게 돌아갔다.”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우리도 부모님을 비롯해 어른이 별세하셨을 때 “돌아가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 말은 고향을 떠나와 살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런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무의식에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상을 전제로 하여 제가 아는 바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태초에 영이신 하나님이 나를 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영인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천국에서 살았습니다. 그 천국이 영혼의 고향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로 천국을 떠나 육신을 입고 세상에 왔습니다. 천국은 사랑과 평화와 기쁨으로 가득한 곳인데, 세상은 살아보니 미움과 갈등과 슬픔으로 가득한 곳입니다. 행복해지려고 무진 노력을 기울이지만 행복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아니, 세상은 불행을 목적으로 하는 곳 같아 보입니다. 그러니 천국에 돌아가 살면 될 일입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서 천국에서 살았던 사실과, 그리고 천국을 떠나왔다는 사실에 대한 기억이 지워진 것입니다. 그 기억이 있다면 당장 천국으로 되돌아가려고 하겠지만, 기억이 없으니 되돌아갈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계속 세상에서 행복을 추구하며 고생을 이어나갑니다. 하지만 기억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희미하게 남아 있어, 무심결에 천국으로 돌아가려는 생각을 가끔 하게 됩니다. 또한 희미하게 남아 있는 천국에 대한 기억은 우리를 천국으로 끌어당기는 힘으로 작용합니다. 그 힘에 의해 죽음을 “돌아갔다”고 표현하게 되고, 또한 야곱처럼 꼭 조상에게 돌아가고 싶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천국으로 돌아가야만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예수님을 비롯하여 여러 영적 스승들께서 말씀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시고 부처님은 해탈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표현만 다를 뿐 같은 내용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바른 신앙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천국으로 돌아가는 여정을 잘 밟아나가려고 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돌아가야 할 천국이 머나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 아주 깊은 곳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천국은 어떤 공간이 아니라 마음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과 관련하여 좀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흔히 누군가 죽으면 이제 천국에서 편안히 쉬시라고 기도합니다. 하지만 그 기도는 상징적인 의미이지 정확한 사실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우리는 대체로 그른 마음과 바른 마음을 왔다 갔다 하면서 인생을 살아갑니다. 영혼의 수준이 낮은 사람은 그른 마음 상태가 많고, 수준이 높은 사람은 바른 마음 상태가 많습니다. 그러다가 죽으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죽어서 완전히 천국에 들어가려면, 그른 마음과 바른 마음을 왔다 갔다 하지 않고 늘 바른 마음 상태로 사는 수준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런 수준에 못 이르고 죽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영계에서 몇십 년 정도 있다가 다시 세상에 오게 됩니다. 곧 윤회를 반복하는 겁니다. 천국에 완전히 들어가면 세상에 다시 태어나지 않습니다. 불교식으로 표현하면 해탈하면 다시 세상에 태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누구나 이번 생의 목표가 둘 중의 하나가 됩니다. 하나는 이 세상에서 행복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를 위해 주로 주변의 것들이 바뀌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배우자도 바뀌고 자식도 바뀌고 또한 주변 환경도 바뀌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바뀌면 행복해질 거로 믿기 때문입니다. 곧 세상이 바뀌면 행복해질 거로 생각하는데, 개중에는 세상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생각의 문제는 자신은 안 바뀌고 주변 곧 세상만 바뀌기를 바란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 목표는 윤회를 반복하겠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영원히 천국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를 위해 세상을 바꾸려고 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바꾸려고 노력합니다. 자신의 배우자나 자식이나 주변 환경은 내버려 두고, 그에 반응하는 자신의 마음을 바꾸려고 합니다. 곧 그른 마음을 바른 마음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목표는 윤회에서 벗어나겠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전자는 내 바깥을 바꾸려고 하는 거고, 후자는 내 안을 바꾸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바깥을 바꾸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좀처럼 바뀌지 않아 바꾸는 과정에서 스트레스를 받게 되어, 행복이 아니라 불행이 깊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 안을 바꾸는 것은 물론 쉬운 일은 아니지만, 내 바깥을 바꾸는 것보다는 쉽습니다. 그리고 조금씩이나마 바뀌는 것에 비례하여 이 세상에서 행복도 얻게 됩니다. 그러니까 전자는 행복을 목표로 삼지만 행복을 얻기 어려운 반면, 후자는 행복을 목표로 삼지 않지만 행복이 부산물로 따라와서 전자보다 더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후자입니다. 곧 주변의 것을 바꾸려고 하지 않고 내면을 완전히 바꾸는 일에 성공하여, 영원히 천국에서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내면을 바꾸면서 살아가면 크게 두 가지가 생겨납니다. 첫째는 자신 안에서 사랑이 커져갑니다. 바른 마음의 가장 큰 속성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만 사랑하지 않고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도 사랑합니다. 자기를 공격하는 사람도 사랑합니다. 그리하여 그를 축복합니다.

  둘째는 자신 안에서 감사가 커져갑니다. 감사는 사랑과 동전의 양면 관계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동시에 감사하며 살게 됩니다. 그러니까 자신 안에서 감사가 점점 늘어나는 게 느껴지면, 내면을 바꾸는 일이 잘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그래서 그런 감사는 인생의 궁극적 목표 달성에 점점 다가가고 있음을 나타내는 증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18년 미국 미네소타 주에 있는 작은 탄광촌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던 에릭 엔스트롬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사진관에 노인이 들어왔습니다. 백발이 성성하고 지쳐 보이는 남루한 차림이었습니다. 신발 털개를 팔러 온 노인은 잠시 쉬었다 가도 되겠냐고 말했습니다. 주인의 허락을 받은 노인은 몹시 시장했던지 빵 한 덩어리와 스프를 테이블 위에 꺼내놓았습니다. 그리고는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엔스트롬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이 노인이 세상적인 것을 많이 갖지는 못했지만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가졌다.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으니까.’ 그는 기도를 드리고 있는 노인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습니다. 그리고 노인의 허락을 받고 사진을 미네소타 사진전에 출품하였습니다. 사진을 통해 1차 세계대전으로 고통받고 있던 사람들에게 아직도 감사할 것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 사진이 ‘미네소타 주의 사진’으로 선정되었습니다. 또한 그의 딸이 그 사진에 감동을 받아 유화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제목을 ‘은혜(The Grace)’라고 붙였습니다. 아마도 여러분이 그 그림을 보셨을 겁니다.

  많은 것을 가졌는데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많은 것을 가졌지만 행복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별로 가지지 못했지만 늘 감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별로 가지지 못했지만 행복합니다. 그래서 행복하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감사는 은혜일 수 있습니다.

  하버드 의과대학팀이 1937년부터 72년 동안 잘사는 삶의 공식을 찾아내기 위해 대학 2학년 학생 300명을 대상으로 조사했습니다. 무려 72년간의 연구 끝에 잘사는 삶의 공식은 ‘감사하는 자세’라고 결론을 내렸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영원히 천국에서 살아가는 것을 목표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바깥을 바꾸려 하지 않고, 자신의 안을 바꾸려 하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안이 그른 마음에서 바른 마음으로 점점 바뀜에 따라, 내면에 형제에 대한 사랑이 점점 확장되기 바랍니다. 그와 동시에 은혜로운 감사도 점점 깊어지기 바랍니다. 그 결과로 부산물처럼 주어지는 행복으로 인해 기뻐하는 날들이 많아지기 바랍니다. ❉

주님,
우리는 모두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 여정에서 어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얻는 행복을 목표로 합니다.
그리하여 자기 바깥을 바꾸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영원히 천국에서 살아가기를 목표로 합니다.
그리하여 자기 안을 바꾸려고 합니다.
그른 마음 상태를 바른 마음 상태로 바꾸려고 노력합니다.
그 과정에서 가끔 신비로운 대양감을 체험하도록 도와주옵소서.
그 황홀한 절정 체험은 천국에 들어가려는 동기를 강화해 줄 터입니다.
성령의 도움으로 그 노력이 결실을 맺어나감에 따라
내면에 형제에 대한 사랑이 확장되고 또한 은혜로운 감사가 깊어지기 바랍니다.
그 결과로 부산물처럼 행복이 주어져 기쁨을 누리는 삶 되게 인도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Copyright 1999-2021 Zeroboard / skin by kid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