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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희담
   천국 소망 (창49:29-33)


  석가모니의 원래 이름은 싯다르타입니다. 싯다르타는 왕자로 태어나 왕궁에서 세상적으로는 무엇 하나 부족함 없이 풍요로운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수의 신하만 데리고 몰래 왕궁 밖으로 나갔습니다. 거기서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신하가 조용히 “생로병사는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불가피한 일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싯다르타가 생각했습니다. ‘이런 일이 나에게도 일어난다는 말인가!’ 혼란스러운 상태에 빠진 그의 눈에 마침 고행을 하는 수행자가 보였습니다. 그들은 생로병사에서 벗어나는 길을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보며 자신도 더는 지금처럼 살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여 29살에 출가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랜 수행 끝에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싯다르타가 생로병사는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그는 갈림길에 서게 된 것입니다. 하나는 계속 왕궁에서 사는 거고, 다른 하나는 출가하여 수행을 길을 걷는 것입니다. 전자는 세상 안에서 행복하게 사는 거고, 후자는 세상을 벗어나 영원한 행복을 사는 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전도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의 마음은 초상집에 가 있고,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은 잔칫집에 가 있다.”(전7:4) 금방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초상집과 잔칫집은 무언가를 상징하는 거 같습니다. 무엇을 상징할까요? 초상집은 죽음과 관련되어 있을 겁니다.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의 마음은 죽음에 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지혜로운 사람은 죽음을 통해 무엇을 생각하는 걸까요? 일반적으로 죽음은 삶의 끝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죽음이 끝이 아님을 알고, 죽음 너머에 있는 무언가 매우 가치 있는 것을 생각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말해서 영생이 아닐까요?

  잔칫집은 세상의 즐거운 일을 상징하는 거 같습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이 잔칫집에 가 있다고 하니, 그 잔칫집은 부정적 의미를 지닐 것입니다. 따라서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은 눈앞의 쾌락에 가 있다는 정도로 이해하면 될 거 같습니다.

  이상을 전제로 하여 전도서의 말씀을 자세히 이해해 보겠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은 눈앞의 쾌락에 가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 삶이라는 것이 죽으면 순식간에 사라지는 허무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인식 없이 세상의 쾌락을 탐닉하는 겁니다. 혹은 죽으면 빈손으로 가는 것이건만,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끝없이 재물을 늘리려고 욕심부리는 겁니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형제의 것을 빼앗거나 형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물론 결과적으로 다양한 형태로 자신이 해를 입는 것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그가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두려움과 좋은 묫자리가 다입니다. 왜 좋은 곳에 묻히기를 원하느냐고 물으면 대부분 미신적인 생각입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세상 삶의 그런 성격을 꿰뚫어 보고, 세상 삶 너머에서 영생을 추구하는 겁니다. 혹은 일순간의 아쉬운 행복이 아니라 영원히 이어지는 행복을 추구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어리석은 사람은 세상이 감옥인 줄 모르고 그 감옥에 갇혀 아등바등한다면, 지혜로운 사람은 세상에서 벗어나 참 자유를 누리기를 추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 다시 싯다르타의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싯다르타가 생로병사의 문제에 대해 알게 된 후 갈림길에 섰다고 했습니다. 그 갈림길에서 그분은 세상에서 행복하게 사는 길 대신, 세상을 벗어나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리석은 사람의 길이 아닌 지혜로운 사람의 길을 선택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사람들의 생의 목표가 둘 중의 하나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첫 번째는 세상에서 행복을 이루는 것이고, 두 번째는 영원히 천국에서 사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목표의 성격은, 오늘 생각하고 있는 어리석은 사람의 길과 지혜로운 사람의 길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두 가지 목표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인 세상에서 행복을 이루는 것을 목표로 삼는 사람들은, 세상이 감옥인 줄 모르고 감옥에 갇혀서 행복을 이루려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 자신은 안 바꾸고 주변 사람이나 세상을 바꾸려고 합니다. 이 목표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마음이 잔칫집에 가 있지만, 그것은 바람일 뿐 실제로는 흥겨운 잔치를 누리기보다는 고통을 많이 겪게 됩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바꾸려고 하는데 좀처럼 바뀌지 않아 엄청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이고, 세상이 바뀌기를 기대하는데 그 기대가 충족되지 않아 실망하고 분노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은 한 번 태어났다가 한 번 죽는 거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죽으면 모든 것이 완전히 끝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죽음 이후에 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인 영계나 윤회에 대해 비과학적인 생각이라며 무시합니다. 그리고 윤회는 불교의 사상이기 때문에 기독교인은 믿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성경에 예수께서 윤회를 인정하는 말씀이 여러 군데 나옵니다. 아무튼 그래서 한 번뿐인 생에서 무언가를 확실히 잡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게 잘 안되니 인생이 고통의 바다가 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본인들은 모르겠지만 윤회를 반복합니다. 이전과 같은 생각과 같은 방식으로 말이죠.

  결론적으로 이 세상에서 행복을 이루려는 목표는 실현 불가능합니다. 설령 제법 행복을 이루었다 하더라도, 감옥에 갇힌 상태의 행복이 온전한 행복일 수 없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그저 가끔 팔자가 좀 나은 생을 만나지만, 나머지 다수의 생에서는 그다지 행복하지 않은 삶을 살아갑니다.

  두 번째인 영원히 천국에서 사는 것을 목표로 삼는 사람들은, 세상이 감옥인 줄 알아 감옥에서 벗어나 천국에서 참 자유의 삶을 살아가려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 주변 사람이나 세상은 내버려 둔 채 자신을 바꾸려고 합니다. 정확히 말해서 자기 마음을 바꾸려고 합니다. 주변 사람이나 세상은 근본적으로 볼 때 자기 마음이 만든 거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합니다. 일체유심조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합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마음을 투사한 세상에서 살아감을 압니다. 자기가 빨간 마음이면 빨간 세상을 살게 되고, 파란 마음이면 파란 세상을 살게 됨을 아는 겁니다. 빨간 마음은 그른 마음을 가리키고, 빨간 세상은 두렵고 사납고 위험합니다. 파란 마음은 바른 마음을 가리키고, 파란 세상은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친절하고 안전합니다. 그래서 빨간 마음을 파란 마음으로 바꾸는 일을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 사람들은 잔칫집의 가치를 그리 높게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잔칫집의 흥겨움은 찰나에 지나지 않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또한 죽음으로 모든 게 끝나지 않음을 압니다. 그래서 죽음 이후의 세계에 관해 관심을 가지는데, 영계에 잠시 머물다 다시 윤회를 반복하는 일을 그치고 천국에 들어가 거기서 영생을 누리려고 합니다.

  흥미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첫 번째 사람들이 세상에서 행복을 목표로 하고 두 번째 사람들은 세상의 행복을 목표로 하지 않는데, 오히려 두 번째 사람들이 세상에서 더 행복하게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사람들이 노력하는 자기 마음 바꿈의 부산물로 행복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곧 파란 마음 상태가 행복한 마음 상태이고, 파란 세상이 행복한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두 번째 사람들은 그럼에도 세상의 행복에 머물려 하지 않고 궁극적으로 천국의 행복을 추구합니다.

  또 한 가지 첫 번째 사람들과 두 번째 사람들의 중요한 차이는 사랑의 마음입니다. 첫 번째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을 바꾸려고 하는데, 그것은 ‘너는 지금 잘못하고 있다’ 혹은 ‘너는 틀렸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공격입니다. 물론 첫 번째 사람들 중에 어려운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려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에게 이런 측면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헌신하는 어려운 이웃에게 아픔을 준 사람들을 정의의 이름으로 거칠게 공격하는 겁니다. 그 공격의 순간 분노가 마음에 가득합니다. 그런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의인과 악인을 똑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악인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축복합니다.

  마지막으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보수적 기독교인 중에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분들 중 상당수가 자기 마음을 바꾸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또한 불교를 비롯한 타 종교에 대해 매우 배타적입니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는 말이 그 배타성을 잘 보여주는 거고, 또한 비기독교인을 공격하는 겁니다. 그 배타성과 공격성이 절에 불을 지르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성 소수자를 배척하여 차별금지법 반대에 앞장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그분들은 천국에 들어가려는 목표를 세운 것은 좋으나 목표를 이루기 어렵습니다.

  또한 두 번째 길을 걷는 것이 싯다르타처럼 출가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리고 천국을 향해 걸어가는 과정에서 틈틈이 세상의 잔치를 즐기기도 합니다. 세상의 잔치를 목표로 하지 않을 뿐 틈틈이 파란 세상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누립니다.

  이상을 정리하자면 싯다르타가 걸어간 길, 전도서 기자가 말한 지혜로운 사람이 걸어가는 길이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 길은 두 번째 사람들이 걸어가는 길과도 넓은 의미에서 같은 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미국 네바다 주 사막에서 ‘멜빈 다마’라는 젊은이가 낡은 트럭을 몰고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허름한 차림의 노인을 발견하고 급히 차를 세웠습니다. 그리고는 “어디까지 가세요? 제가 태워드릴게요.”라고 말했습니다. 그 노인은 “라스베이거스까지 태워다 줄 수 있겠소?”라고 물었습니다. 젊은이는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어느덧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했습니다. 불쌍하고 가난한 노인이라고 생각한 젊은이는 25센트를 노인에게 주면서 말했습니다. “영감님, 차비에 보태세요.” 그러자 노인이 말했습니다. “참 친절한 젊은이로구먼. 명함 한 장 주게나.” 젊은이는 무심코 명함을 건네주었습니다. 명함을 받아든 노인이 말했습니다. “멜빈 다마, 고맙네. 이 신세는 꼭 갚겠네. 나는 하워드 휴즈라는 사람이라네.”

  얼마의 세월이 흘러 놀라운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세계적인 부호 하워드 휴즈 사망”이란 기사와 함께 하워드 휴즈의 유언장이 공개되었습니다. 하워드 휴즈는 영화사, 방송국, 비행기 회사, 호텔, 도박장 등 50개 업체를 가진 재계의 거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유산 중 16분의 1을 멜빈 다마에게 증여한다는 내용이 유언장에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멜빈 다마란 사람이 누구인가?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다행히 유언장 이면에 휴즈가 적어 놓은 멜빈 다마의 연락처와 함께, 자신이 일생을 살아오면서 만났던 가장 친절한 사람이라는 메모가 있었습니다. 당시 휴즈의 유산 총액이 250억 달러 정도였으니, 젊은이는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1천 7백억 원가량을 받은 겁니다. 돈으로만 보자면 25센트의 친절이 6억 배 커져 돌아온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선 하워드 휴즈가 그 많은 재산 중 한 푼도 갖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흔히 하는 말로 공수래공수거입니다. 휴즈가 남긴 마지막 말은 “Nothing”이었습니다. 휴즈는 그 말을 반복하면서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그가 생전에 누렸던 그 많은 돈도, 미녀들도, 명예도 죽어가는 그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뜻일 겁입니다.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하더라도 죽음이 찾아오면 Nothing이 됩니다.

  그래서 그런 사실을 미리 알고 싯다르타처럼 지혜로운 사람은, 살아갈 때 이미 세상을 Nothing으로 여깁니다. 전도서를 지혜서라고 부르는데, 전도서 기자도 지혜로운 사람은 세상을 Nothing으로 여기며, 죽음 너머의 세계에 마음을 둔다고 말한 것입니다. 곧 천국에서 누릴 진정한 행복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또 한 가지 주목하는 것은, 젊은이가 불쌍해 보이는 노인을 라스베이거스까지 차로 태워주고 25센트를 준 사실입니다. 휴즈는 아마 차를 타고 가는 동안 젊은이의 태도에 이미 깊은 호감을 느꼈을 거로 생각됩니다. 그렇게 호감을 느꼈는데 거기에 더해 25센트를 주니 젊은이가 마음에 깊게 남았던 모양입니다. 오죽하면 일생을 살아오면서 만난 사람 중에서 가장 친절한 사람이었다고 표현했겠습니까. 그러니까 단순히 25센트를 준 것의 문제가 아니라, 25센트를 주는 행위에 배어 있는 친절한 마음을 주목하는 겁니다. 어쩌면 젊은이는 파란 마음으로 가난해 보이는 노인을 대했고, 그래서 성령은 파란 세상에서 행운을 안겨주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빨간 세상에도 행운은 있습니다만, 파란 세상의 행운과 성격이 아주 다릅니다.

  여러분, 전도서 기자가 말하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 천국을 목표로 하여 살아가지 않으시렵니까? 그리하여 세상 행복을 목표로 하는 사람보다 더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지 않으시렵니까? 모든 형제를 사랑하고 축복하는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지 않으시렵니까? 빠르면 이번 생을 끝으로 하여 천국에 들어가든지, 아니면 그리 멀지 않은 시간 안에 천국에 들어가 하나님 품에서 기쁨과 자유를 누리게 되시기 바랍니다. ❉

주님,
하워드 휴즈는 임종 때가 되어야 비로소 인생이 nothing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젊은 나이에 이미 인생이 nothing임을 알았습니다.
우리도 임종 때가 아니라 미리 인생이 nothing임을 알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천국에 대한 소망으로 인생을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그러다 언젠가는 오늘 본문의 야곱처럼 죽을 날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 무렵 빨간 마음 상태가 많은 사람도 있을 거고
파란 마음 상태가 많은 사람도 있을 겁니다.
전자는 빨간 세상을 많이 살았을 테니 지나온 세월이 험악했다고 회상할 거고
후자는 파란 세상을 많이 살았을 테니 지나온 세월이 즐거웠다고 회상할 겁니다.
더 나아가 전자는 다음 생도 험악한 인생이 될 확률이 높고
후자는 다음 생이 이번 생보다 훨씬 편안할 확률이 높을 겁니다.
개중에 거의 파란 마음으로만 인생의 말년을 맞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번 생을 끝으로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는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살았을 거고 그 목표를 달성한 것입니다.
우리 신명인이 모두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마음 바꾸기를 노력하며 살아
점점 파란 세상을 살아가는 시간이 늘어 사랑과 감사가 깊어지게 하옵소서.
그러다 간혹 뜻밖의 행운도 경험하게 하옵소서.
죽을 날이 되었을 때 여전히 빨간 마음을 선택하는 순간이 있더라도
다음 생은 이번 생보다 훨씬 행복한 각본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혹은 극적으로 목표를 달성하여 육체를 벗는 순간 천국에 들어가는 영광을 누리는 형제도 있게 하여 주옵소서.
이 모든 과정을 성령께 내맡기며 성령의 인도를 지혜롭게 따르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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