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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희담
   초록빛 자아 (마22:37-40)


  갑돌이가 친구와 함께 여행을 갔습니다. 밤에 여인숙에 들어가 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는 사이에 자기를 잃어버릴까 두려워, 혹 도둑이 자기를 훔쳐 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기둥에 끈으로 자기 다리를 묶고 잤습니다. 친구가 장난삼아 그 끈을 풀어 자기 다리에 묶고 잤습니다. 아침에 갑돌이가 깨어 끈에 묶여 잠자고 있는 친구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합니다. “분명 나는 저기에 있는데, 여기 있는 이 몸은 누구인가?”

  갑돌이는 끈에 묶여있는 게 자기라고 알고 잠이 든 것입니다. 그런데 아침에 깨어보니 자기가 끈에 묶여 있지 않은 겁니다. 대신 친구가 끈에 묶여있습니다. 하지만 ‘끈에 묶여 있는 것이 나’라는 생각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끈에 묶여 있는 나와 그걸 보는 나 사이에서 혼란을 겪고 있는 겁니다.  

  이는 사람들이 참 나를 상실하고 살아간다는 것을 말해주는 이야기입니다. 과연 나는 누구입니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합니다. 그 답을 제대로 찾아내면, 그리고 찾아낸 참 나로서 살아가면 지금보다 훨씬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나는 누구일까요?

  조애나 메이시는 수행자이자 심층 생태학자 그리고 환경운동가입니다. 그이는 1964년 남편과 세 아이와 함께 인도에서 티베트 난민을 돕는 일을 했습니다. 그 무렵 기차를 타고 여행하던 중 ‘나’라고 집착하던 것이 본래 없다는 ‘무아(無我)’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이는 세상을 ‘나의 연인’ 또는 ‘나 자신’으로 보자고 주장했습니다. 이 세상을 선악의 대결장으로 보고 자신이 선의 편에 서 있다고 생각하는 한, 오만불손한 공격성에 사로잡혀 살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조애나 메이시의 생각을 기반으로 하여 나는 누구인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피부로 둘러싸인 나를 나라고 생각합니다. 곧 자기 몸 안에 있는 것을 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훨씬 너른 자아 개념을 생각해 보는 겁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를 다 포함할 만큼 엄청나게 큰 나를 생각하는 겁니다. 그렇게 보면, 나는 자본가의 착취로 말미암아 가난에 시달리는 노동자입니다. 또한 나는 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본가입니다. 나는 독재에 시달리는 민중입니다. 또한 나는 민중을 탄압하는 독재자입니다. 더 나아가 나는 도끼질을 당하여 죽어가는 나무입니다. 또한 나는 나무에 도끼질하는 나무꾼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이웃이 나입니다. 선과 악의 싸움을 벌이고 있는 양쪽 모두가 나입니다. 피해를 주는 이웃과 피해를 보는 이웃 모두가 나입니다. 또한 나무와 참새와 바람이 나인 것입니다. 조애나 메이시는 이런 큰 나를 ‘초록빛 자아’ 라고 표현하였습니다. 피부에 둘러싸인 자아와 대비되는 초록빛 자아를 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표현이 제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본문을 보겠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웃을 확대해서 생각하면 세상이 됩니다. 그러니까 세상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인데, 이는 세상과 자신에게 동등한 가치를 두라는 의미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세상과 자신을 하나로 이해하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세상과 자신을 하나로 이해하며, 그리고 그 세상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불화와 싸움은 대개 ‘내가 옳고 너는 틀렸다’는 생각에서 비롯됩니다. 모든 원망, 갈등, 비판 등은 바로 그 생각에서 비롯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상대 세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하나가 절대적으로 맞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상대 세계에서 유일하게 틀린 것이 있다면, ‘나는 맞고 너는 틀렸다’는 생각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 생각은 무지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여지를 늘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누가 맞고 틀린 것이 아니라, 그저 다를 뿐이다’라는 생각으로 발전해야 합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너는 그렇게 생각할 뿐, 그렇게 우리는 다르게 생각할 뿐이다’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거기서 ‘우리는 다르면서도 또한 하나다’라는 생각으로 더욱 발전해야 합니다.

  예컨대 왼손이 오른손에게 ‘너는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낮은 수준입니다. 그 수준에서 발전하여 ‘너와 나는 다를 뿐이다’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서 머물면 아직 부족합니다. 물론 왼손과 오른손이 다르지요. 그러나 왼손과 오른손은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개체로서 하나입니다. 거기까지 인식이 발전해야 합니다.

  사람들 관계를 넘어서, 모든 사물 관계에서도 하나라는 인식이 자리 잡아야 합니다. 나무와 풀, 참새와 나비, 모든 것들과 나는 하나라는 인식이 자리 잡아야 합니다. 자신을 피부 안에 있는 것으로 인식하지 않고, 세상 모두와 하나인 큰 나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곧 피부라는 경계를 허물고 무경계의 인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피부 안에 있는 나를 사랑하듯 큰 나를 사랑합니다. 곧 세상 전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 속에 어둠이 있으면 그 어둠을 내쫓아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빛을 비추는 것입니다. 그것이 초록빛 자아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스승이 제자들과 함께 강에 목욕하러 갔습니다. 일행이 강으로 걸어 내려갈 때, 강둑에 있던 남자와 여자가 상대방을 향해 화를 내며 소리 지르고 있었습니다. 여자가 목욕하다가 목걸이를 분실했는데, 남자가 심하게 질책하자 여자도 화가 나서 언성이 높아진 것입니다. 스승이 걸음을 멈추고 제자들을 돌아보며 물었습니다. “사람들은 화가 나면 왜 소리를 지르는가?” 한 제자가 말했습니다. “평정심을 잃기 때문이 아닐까요?” 또 다른 제자가 말했습니다. “분노에 사로잡혀 이성이 마비되기 때문이 아닐까요?” 스승이 되물었습니다. “하지만 상대방이 바로 앞에 있는데 굳이 크게 소리를 질러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큰 소리로 말해야만 더 잘 알아듣는 것도 아니고, 조용히 말해도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전달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 스승은 다시 물었습니다. “사람들은 왜 화가 나면 소리를 지르는가?” 제자들은 다양한 이유를 내놓았으나 어느 대답도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스승이 설명했습니다. “사람들은 화가 나면 서로의 가슴이 멀어졌다고 느낀다. 그래서 그 거리만큼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소리를 질러야만 멀어진 상대방에게 자기 말이 가 닿는다고 여기는 것이다. 화가 많이 날수록 더 크게 소리를 지르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소리를 지를수록 상대방은 더 화가 나고, 그럴수록 둘의 가슴은 더 멀어진다. 그래서 갈수록 목소리가 커지는 것이다.” 스승은 처음보다 더 큰 소리로 싸우는 남녀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면 두 사람의 가슴은 아주 멀어져서 마침내는 서로에게 죽은 가슴이 된다. 죽은 가슴에겐 아무리 소리쳐도 전달되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더 큰 소리로 말하게 되는 것이다.”

  스승은 잠시 뜸을 들인 후 말했습니다. “그러면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사랑하면 부드럽게 속삭인다. 두 가슴의 거리가 매우 가깝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로에게 큰소리로 외칠 필요가 없는 거다. 사랑이 깊어지면 두 가슴의 거리가 사라져서 아무 말이 필요 없는 순간이 찾아온다. 두 영혼이 완전히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그때는 서로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말없이도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람들이 화를 낼 때와 사랑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분노하면 가슴의 거리가 멀어진다는 것과, 그래서 상대방이 내가 하는 말을 잘 못 알아듣게 된다는 상상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주 멀어진 가슴은 죽은 가슴이고, 그래서 아무리 소리쳐도 전달되지 않는다는 상상력 또한 참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반대로 사랑이 깊어지면 마침내 가슴의 거리가 사라진다는 상상력도 놀랍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분노하면 할수록 점점 서로의 가슴이 멀어져서 마침내 죽은 가슴이 된다고 합니다. 반대로 사랑하면 할수록 점점 서로의 가슴이 가까워지다가, 마침내 가슴의 거리가 사라져 버리게 된다고 합니다. 곧 둘이 하나가 된다는 겁니다. 간단하게 말해서분노하면 서로 죽은 가슴의 상태가 되고, 사랑하면 하나가 된다는 겁니다.

  상대방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분노의 상태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상태가 된다는 것은, 상대방이 나와 다르다는 생각을 넘어서서 상대방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이제 그 상대방이 세상 만물로 확장될 때, 나는 초록빛 자아로서 세상을 사랑하며 살게 됩니다. 초록빛 자아는 매우 큰 자아이고 또한 참 자아입니다. 그런 참 자아로 살아갈 때 우리는 진정한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는 피부로 둘러싸인 나를 나로 생각하며 살아가는 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모든 것이 나라는 생각은 매우 낯섭니다. 초록빛 자아라는 개념이 아름다워 보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초록빛 자아로서 살아가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현재 우리 수준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뜻을 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초록빛 자아를 목표로 정하는 것입니다. 어렵다고 해서 뜻을 세우지 않으면 평생 피부로 둘러싸인 나를 나로 생각하며 살게 됩니다. 그 작은 나에 갇혀서 살게 됩니다. 그러면 평생 내가 맞고 상대방은 틀렸다는 생각으로 살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상대방은 나에게서 멀어집니다. 그러면 수시로 언짢음이나 분노로 살게 됩니다. 또한 작은 나에 갇혀 사니 수시로 한계와 연약함을 느끼며 신음하게 됩니다. 그것은 불행한 삶입니다.

  따라서 초록빛 자아에 대한 뜻을 세우는 겁니다. 그리고 주님께 간절히 도움을 요청하는 겁니다. 또한 사랑을 결심하는 겁니다. 그러면 상대방과의 가슴 거리가 아주 조금씩이나마 점점 가까워집니다. 모든 사물과의 거리도 아주 조금씩이나마 점점 가까워집니다. 그리고 아주 먼 미래겠지만 온전한 초록빛 자아로서 사랑과 평화의 가슴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온 우주와 하나 되어 하나님의 권능을 발휘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그 긴 여정은 점점 행복해지는 길입니다. 여러분이 그 여정을 웃는 예수님을 수시로 떠올리며 그분의 은총에 감싸여 잘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

주님,
우리는 대체로 피부로 둘러싸여 있는 나를 나로 여기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진정한 나는 그 몸인 나가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딸)이라고 할 때
그것은 피부로 둘러싸여 있는 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것은 영이신 하나님과 똑같이 몸이 아닌 영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참 나는 피부로 둘러싸여 있는 나가 아니라
영으로서 하나님의 아들(딸)이라는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이게 도와주옵소서.
하나님의 아들(딸)로서 나는 모든 이웃을 나와 똑같은 하나님의 아들(딸)로서 만납니다.
더 나아가 모든 사물도 나와 똑같은 하나님이 창조물로서 만납니다.
그리하여 모든 이웃과 모든 사물은 나의 연인이고 나 자신입니다.
그런 인식을 가질 때 나는 초록빛 자아로써 살게 됩니다.
초록빛 자아로서 사랑과 평화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늘 내 안에서 환하게 웃으시며 사랑을 주시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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