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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희담
   초록빛 자아의 배짱과 사랑 (마14:22-33)


  최인호 씨가 지은 소설 <상도>에 다음과 같은 장면이 나옵니다. 주인공 임상옥은 인삼을 팔기 위해 중국 북경으로 갑니다. 임상옥은 예년보다 훨씬 비싼 값을 부릅니다. 그러자 중국 상인들은 담합하여 인삼을 안 사겠다고 위협합니다. 다시 값을 내릴 수도 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인삼을 팔지 못하고 돌아간다면 완전히 망하는 겁니다. 임상옥은 큰 위기를 만난 것입니다.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이 도무지 보이지 않습니다. 마침 친구처럼 지내는 추사 김정희가 북경에 있기에, 임상옥은 술병을 들고 그를 찾아갑니다.

  취기가 오르자 임상옥은 추사에게 고민을 털어놓습니다. “여보게 김 생원. 어떤 사람이 지금 백척간두(百尺竿頭)-백 척이나 되는 장대 끝-에 올라서 있네. 오도 가도 할 수 없고 꼼짝없이 죽게 되었네. 그 사람이 어떻게 하면 그 백척간두에서 내려올 수 있겠나?” 추사는 “백척간두에서 내려올 수는 없소.”라고 말합니다. 임상옥이 다시 묻습니다. “내려올 수 없다면 거기서 어떻게 하면 살아날 수 있겠는가?” 추사는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라고 말합니다. 임상옥이 놀라며 말합니다. “백척간두 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죽음이 아닌가?” 그러자 추사가 담담하게 말합니다. “죽음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오직 죽음뿐이요.”

  임상옥이 집으로 돌아와서 조선에서 가져온 인삼을 마당에 쌓아놓고 불을 지르는 일대 모험을 감행합니다. 인삼이 불에 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중국 상인들이, 값을 올려줄 테니 제발 불을 꺼달라고 사정합니다. 임상옥은 죽기를 각오하고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 더 내딛음으로써, 가져온 인삼을 원하는 가격에 팔 수 있었습니다.

  추사가 임상옥에게 제시한 길을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라고 합니다. 이는 아득한 천길 벼랑 끝에서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을 때, 생과 사를 초월하여 한 걸음 더 내딛음으로써만 살길이 열린다는 뜻입니다. 백 척이나 되는 높은 대나무 끝에 매달려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사람에게, 대나무를 놓아버리라는 말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 죽음의 두려움을 무릅쓰고 죽음 속으로 뛰어들 때, 오히려 살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백척간두진일보와 지난 시간에 살펴본 초록빛 자아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초록빛 자아를 다시 간단히 설명해 드리면 이런 것입니다. 흔히 우리는 자신을 피부로 둘러싸인 나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그런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이웃 사람과, 또한 나무, 풀, 벌레, 새, 동물 등 모든 생명체도 나로 이해하는 겁니다. 곧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를 합하여 큰 나라고 이해하고, 그런 나를 초록빛 자아라고 표현하였습니다.

  한편 우리는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딸)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피부로 둘러싸여 있는 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것이 영이신 하나님과 똑같이 영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기독교인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딸)로 생각하면서, 동시에 피부로 둘러싸인 나로 생각하는 겁니다. 그 둘이 하늘과 땅만큼의 큰 차이를 지닌다는 사실을 잘 모르는 겁니다. 엄격하게 말해서 피부로 둘러싸인 나는 가짜 나이고, 하나님의 아들(딸)이 진짜 나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정체성을 피부로 둘러싸인 나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딸)로 여길 때 구원의 길이 열리는 겁니다. 그리고 초록빛 자아는 하나님의 아들(딸)에게 붙여진 별칭과 같은 거로 이해하면 됩니다.

  사실 초록빛 자아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조애나 메이시는, 그이가 기독교인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딸)이라는 개념을 잘 모를 겁니다. 하지만 제가 볼 때 초록빛 자아를 하나님의 아들(딸)의 별칭으로 생각해도 될 거 같습니다. 그래서 조애나 메이시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이상을 전제로 하여 초록빛 자아가 지닌 두 가지 모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초록빛 자아는 배짱의 존재입니다. 우리가 미래에 대해 가질 수 있는 감정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불안과 희망입니다. 불안이란 미래에 나쁜 일이 일어날까 봐 걱정될 때 느끼는 감정입니다. 그리고 희망이란 미래에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을 믿을 때 느끼는 감정입니다. 우리가 안 좋은 상황에 놓이게 되면 대개 불안을 느낍니다. 가벼운 불안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지만, 불안이 깊어지면 크게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그리하여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큰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런데 안 좋은 상황에서도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안 좋은 상황에 놓이게 되면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불안은 선택입니다. 물론 희망도 선택입니다. 어떻게 하면 불안 대신 희망을 선택할 수 있을까요?

  희망이란 미래에 좋은 일이 일어날 거로 믿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 믿음을 배짱이란 말로 바꿔서 표현해 봅니다. 그 배짱이 피부로 둘러싸인 자아에 갇혀 있어서는 좀처럼 생겨나지 않습니다. 큰 자아로 옮겨가야 합니다. 곧 세상 전체가 나라는 인식, 바로 초록빛 자아 인식에서 배짱이 가능해집니다. 따라서 초록빛 자아 인식을 가질 때 희망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사건을 주도하시고, 저녁이 되자 변함없이 산으로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헤어져 배를 타고 가던 제자들이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그래 밤새 바다 위에서 시달렸습니다. 다음 날 새벽, 예수님은 물 위를 걸어 여전히 바다 위에 있는 제자들이 탄 배로 가셨습니다. 베드로가 자기도 물 위를 걸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 예수님의 도움으로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었습니다. 그런데 거센 바람이 불어오자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자 그 순간 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을 가지고 물 위를 걸을 때는 초록빛 자아 인식을 가졌던 거고, 두려움을 느끼고 물에 빠진 때는 피부에 둘러싸인 자아 인식을 가졌던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초록빛 자아로서 믿음을 가질 때, 물 위를 걷는 것과 같은 신나는 현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피부로 둘러싸인 자아로서 불안을 가질 때, 물에 빠지는 것과 같은 암울한 현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초록빛 자아로서 배짱을 가질 때, 안 좋은 상황에서도 불안에 떠는 대신 희망으로 가슴 설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백척간두와 같은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연한 미소를 머금고 앞으로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습니다. 이렇듯 초록빛 자아는 배짱의 존재입니다.

  둘째 초록빛 자아는 사랑의 존재입니다. 백척간두 진일보의 원래 뜻은 이런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수행을 열심히 하여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리하여 아주 높은 인식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곧 백척간두에 이른 것입니다. 여기서 백척간두는 아주 높은 인식 수준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지만 거기서 만족하면 안 되고 다시 진일보하여야 했습니다. 그 진일보는 중생의 세계로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높은 인식 수준에서 세상을 사랑하기 위해 세상 속으로 뛰어드는 것, 이것이 백척간두 진일보의 본래 뜻이었습니다. 그것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가진 것을 타인에게 주면 주는 만큼 내가 가진 것이 줄어든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가진 것이 많아야 세상에서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가 가진 것이 줄어들게 되는, 그 주는 일에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 두려움 때문에, 주더라도 내 안전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주려고 합니다. 이것이 피부로 둘러싸인 자아에서 비롯되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초록빛 자아는 전혀 다르게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나이기 때문에, 내가 주면 내가 받습니다. 주는 나와 받는 나가 분리되어 있지 않고 하나입니다. 그리하여 내가 주면 내가 가진 것이 더 늘어나는 겁니다. 이런 형이상학적 현상에 대한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이런 현상을 마음으로 완전히 이해하고, 실제로 줄 수 있는 힘을 가질 때 깨달았다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주는 일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나를 피부로 둘러싸인 존재로 생각하면 진정한 사랑은 불가능합니다. 세상 모든 것과 하나인 존재, 곧 초록빛 자아를 나로 인식할 때 진정한 사랑이 가능해집니다. 이렇듯 초록빛 자아는 사랑의 존재입니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초록빛 자아는 배짱과 사랑의 존재입니다. 첫째로 백척간두의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불안해하지 않고 배짱으로 희망을 품고 앞으로 걸어가는 차원에서, 둘째로 백척간두의 높은 인식 수준에서 세상을 사랑하기 위해 앞으로 걸어가는 차원에서, 초록빛 자아는 배짱과 사랑의 존재입니다. 다시 말해서 첫째 차원이든 둘째 차원이든 백척간두 진일보가 초록빛 자아의 모습입니다.

  처음에 말씀드렸던, 초록빛 자아는 하나님의 아들(딸)의 별칭이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합니다. 그러니까 초록빛 자아는 창조주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곧 초록빛 자아의 아버지는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초록빛 자아는 하나님 안에서만 그 가치를 발휘합니다. 아버지께서 전능하시기 때문에 초록빛 자아로서 배짱을 가질 수 있고, 아버지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에 초록빛 자아로서 사랑을 전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초록빛 자아로서 살 때 존재의 무게중심을 성령께 두고, 늘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여러분이 초록빛 자아 인식으로, 배짱과 사랑의 존재로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존재가 뿜어내는 아름다움으로 인해 여러분 자신과 세상이 구원되기를 바랍니다. ❉

주님,
피부로 둘러싸인 나는 자신을 왜소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초록빛 자아는 자신을 장엄하다고 생각합니다.
왜소하다는 자아 인식에서 불안, 두려움, 이기성, 욕심 등이 나옵니다.
그리고 장엄하다는 자아 인식은 희망, 사랑, 기쁨을 빚어냅니다.
내가 초록빛 자아 곧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도와주옵소서.
또한 피부로 둘러싸인 몸은,
하나님의 자녀가 세상을 사랑하기 위한 좋은 도구일 뿐임을 알게 도와주옵소서.
그리하여 피부로 둘러싸인 몸을 잘 돌보아,
세상을 사랑하는 도구로 사용함에 부족함이 없게 도와주옵소서.
우리 모두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에 빛을 전하는 복된 길 걸어가게 도와주옵소서.
늘 내 안에서 환하게 웃으시며 사랑을 주시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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