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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희담
   I am helpful (눅22:24-27)


  아이는 초등학교 1학년이었습니다. 어느 미술 시간이었습니다. 아이는 자주색으로 천막을 그렸습니다. 그 그림을 본 선생님이 말했습니다. 이 그림은 사실적이지 않다고 말입니다. 자주색은 천막에는 쓰이지 않는 색깔이라는 것입니다. 자주색은 죽은 사람들에게나 쓰는 색이며, 따라서 이 그림은 다른 아이들 것과 함께 교실 벽에 걸어 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아이의 마음에 어두운 밤이 내려와 앉았습니다. 아직 오후도 되지 않았는데 말이죠.

  아이가 2학년이 되었습니다. 선생님도 바뀌었습니다. 역시 미술 시간이었습니다. 선생님이 말했습니다. “아무거나 그리고 싶은 대로 그려라.” 무엇을 그리든 자유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는 아무것도 그리지 못한 채 백지만 책상 위에 달랑 얹어 놓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교실을 한 바퀴 돌아 아이의 자리까지 왔을 때 아이는 심장이 콩 콩 뛰었습니다. 선생님은 그 큰 손으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들판에 온통 하얀 눈이 내렸구나. 정말 멋진 그림이야!” 그 말을 들은 아이의 마음에 하얀 함박눈이 내렸습니다. 그리고 그 눈을 맞으며 뛰노는 강아지처럼 마음이 설렘으로 가득하였습니다.

  두 선생님이 참 크게 다릅니다. 1학년 때 선생님은 아이의 기를 죽이는 선생님이었고, 2학년 선생님은 아이의 기를 살리는 선생님입니다. 1학년 때 선생님은 아이에게 트라우마를 안겨주었습니다. 2학년이 된 아이는 그 트라우마 때문에 아무것도 그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2학년 선생님은 그 트라우마를 치유해 주었습니다. 1학년 때 선생님은 아이를 공격한 것이고, 2학년 선생님은 아이에게 사랑을 전한 것입니다. 그 사랑으로 아이의 트라우마가 치유되었습니다.

  지난 주일에 갑돌이는 인생은 악하고 추한 거로 생각하고, 갑순이는 인생은 아름다운 거로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갑돌이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고, 갑순이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를 줄여서 갑돌이 형 인간과 갑순이 형 인간이라고 표현하겠습니다. 갑돌이 형 인간은 세상을 거친 거로 지각하기에, 자신도 세상에 거칠게 반응하게 됩니다. 갑순이 형 인간은 세상을 아름다운 거로 지각하기에, 자신도 세상에 아름다움으로 반응하게 됩니다. 오늘 이야기의 1학년 때 선생님은 갑돌이 형 인간이고, 2학년 선생님은 갑순이 형 인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두 사람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밥상 앞에 앉은 사람과 시중드는 사람입니다. 그리고는 누가 더 높으냐고 물으십니다. 물론 밥상 앞에 앉아 시중받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이 시중드는 사람으로 우리 가운데 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도 시중드는 사람으로 살라고 하십니다.

  밥상 앞에 앉은 사람은 주인이고, 시중드는 사람은 종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인이 아니라 종의 팔자로 살라는 것입니까?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사회적 신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대하는 마음 자세를 가리키는 겁니다. 사회적 신분이 어떠하든지 시중드는 사람의 자세로 이웃을 섬기라는 겁니다. 왕이라 하더라도, 부자라 하더라도 시중드는 사람의 자세로 이웃을 섬기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시중드는 사람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요? 자기중심적이지 않아야 합니다. 곧 무게중심이 상대방에게 두어져 있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상대방에 대해 깊은 관심과 섬세한 배려가 있어야 합니다. 상대방이 지금 기분이 어떤지, 어떤 마음 상태인지, 몸의 컨디션은 어떤지 등에 대해 모른다면 제대로 시중을 들 수 없을 겁니다. 따라서 제대로 시중을 들려면 우선 상대방의 상태를 잘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상태에 알맞게 돌봄을 제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섬김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따라서 섬김은 진정한 사랑의 자세에서 비롯됩니다.

  앞의 이야기에서 2학년 선생님은 시중드는 자세로 아이를 대한 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참 좋은 선생님은 아이들을 대할 때 시중드는 자세로 대하는 겁니다. 아이들의 마음을 헤아리며 지지와 격려와 사랑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이들의 기를 살리게 됩니다. 그런 선생님은 마음에 상처를 입고 아무것도 그리지 못하고 있는 아이에게, “들판에 온통 하얀 눈이 내렸구나. 정말 멋진 그림이야!”라고 말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간호사가 되기 위해 간호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입학한 지 두 달이 지난 어느 날이었습니다. 교수님은 수업 시간에 강의 대신에 간단한 문제가 수록된 시험지를 돌렸습니다. 수업을 착실하게 들었던 그는 별로 어렵지 않게 문제를 풀어나갔습니다. 그러다 마지막 문제에서 막혔습니다. “우리 학교를 깨끗하게 청소해 주는 아주머니의 이름은?” 그는 당황했습니다. ‘이것이 시험문제라고 할 수 있는가’ 하고 반발하는 마음이 올라왔습니다. 그는 그 아주머니를 여러 번 봤습니다. 검정 머리에 키가 크고 나이는 오십대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름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는 마지막 문제의 답을 공란으로 두고 답안지를 제출했습니다.

  모두 답안지를 제출하고 난 후, 한 학생이 마지막 문제도 점수에 반영되는 거냐고 물었습니다. 교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물론이지. 여러분은 간호사로서 앞으로 수많은 사람을 대하게 될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중요한 사람입니다. 이들은 여러분의 각별한 주의와 세심한 배려를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여러분은 이들을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따스한 미소로 맞아야 합니다.” 그는 교수님의 문제 의도를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그날이 그의 간호학교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수업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 그 청소해 주는 아주머니의 이름을 영원히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청소해 주는 아주머니의 이름을 꼭 알아야 한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교수님의 의도가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주변의 이웃들에게 더 섬세한 관심과 깊은 애정으로 임해야 한다는 뜻일 겁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중요한 지침을 안겨줍니다. 비단 간호사뿐만 아니라, 우리가 모두 그런 자세로 이웃을 대하면 좋을 것입니다. 우리 주변의 작은 이웃들에게 따스한 관심과 섬세한 배려로 임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시중드는 자세로 이웃을 대하는 것입니다. 섬김의 자세로 이웃을 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사람이 진정으로 큰 사람, 진정으로 높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선생님이 학생들을 시중드는 자세로 가르친다면, 그 학생들은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하지 않겠습니까? 간호사가 환자들을 시중드는 자세로 대한다면, 그 환자들의 병은 더 빨리 치료되지 않겠습니까? 남편이 아내를 그리고 아내가 남편을 시중드는 자세로 대한다면, 그 부부는 참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부모가 아이들을 시중드는 자세로 양육한다면, 그 아이들은 활기찬 모습으로 자라나지 않겠습니까? 사장이 종업원들을 시중드는 자세로 대한다면, 그 회사는 단결된 힘으로 어떤 어려움도 이겨내지 않겠습니까? 대통령이 국민을 시중드는 자세로 대한다면, 그 나라는 국민의 자발적 힘으로 날로 발전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자연 생명체들을 시중드는 자세로 대한다면, 우리는 아름다운 환경을 누리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제각기 상대방에게 시중드는 자세로 대한다면, 우리 사회는 참 따뜻해지지 않겠습니까? 저는 목회자로서 여러분을 시중드는 자세로 대하려고 합니다.

  helpful이라는 영어 단어가 있습니다. ‘도움이 되는’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말을 ‘진실로 도움이 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그 사람의 모습을 간단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바른 마음, 친절한 마음 상태입니다. 그런 마음 상태로서 상대방의 바른 마음과 하나로 결합합니다. 현재 상대방의 겉모습이 매우 부족해 보이더라도 그것을 눈여겨보지 않습니다. 곧 그의 겉모습에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대신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라는 그의 본성을 또렷이 만납니다. 무한한 사랑, 무한한 신뢰, 무한한 인내로 그를 축복합니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 나오는 표현을 빌리자면, 그를 무한히 추앙합니다. 그것이 helpful의 모습입니다.

  저는 helpful로서 살아가려는 뜻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만날 때 속으로 ‘I am helpful.’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말하고 만나면 좋은 만남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잊어버리고 그 말을 하지 못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고 잘 기억하려고 애씁니다. 어쨌든 진실로 도움이 되는 사람이라는 뜻인 helpful은, 시중드는 사람과 같은 뜻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상대방에게 도움을 준다는 생각으로 충고하거나 훈계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충고나 훈계는 helpful의 모습과는 거리가 멉니다. 왜냐하면 충고나 훈계는 그른 마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helpful은 그저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고 공감하고 지지해줍니다. 상대방의 모든 행동을 허용합니다. 그러다 자기 생각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에 따라 지혜로운 권면을 전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내 코가 석 잔데 무슨 남을 돕느냐고 말입니다. 혹은 나는 남을 도울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helpful일 때 도움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성령입니다. 나는 그저 helpful이 되겠다는 용의만 내면 됩니다. 바른 마음이 되겠다는 용의만 내면 됩니다. 그러면 나를 통해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성령께서 나를 helpful로 사용하십니다. 그런 시스템에 대한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모두 행복을 원합니다. 그리고 행복을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런데 행복을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과 무관한, 혹은 주님의 뜻을 거스르는 방법으로 행복을 추구합니다. 설령 그 추구가 성공하더라도 그는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주님의 뜻은 우리가 이웃을 시중드는 자세로 대하는 것입니다. 섬김의 사랑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기를 선택합니다. 그리하여 2학년 선생님처럼 아이에게 “들판에 온통 하얀 눈이 내렸구나. 정말 멋진 그림이야!”라고 말할 것입니다. 또한 청소해주는 아주머니의 이름까지 알고, 그 아주머니를 만날 때마다 따스한 미소를 전할 것입니다. 갑순이 형 인간으로서 세상은 아름다운 거로 지각하며, 세상에 아름다움으로 반응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주님의 뜻을 이뤄가는 길을 잘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 안에서 행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

주님,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지금 주님의 섬김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종종 은혜를 받는 것은 바로 주님의 섬김을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주님을 본받아 이웃을 섬기는 삶을 살려고 합니다.
‘I am helpful.’이라는 고백으로 이웃을 만나는 삶을 살려고 합니다.
그 삶의 진행을 주님께 내맡기오니 온전히 인도해 주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관계에서 주님의 은혜가 눈부시게 하여 주옵소서.
늘 내 안에서 환하게 웃으시며 나를 사랑하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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