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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희담
   촛불을 끄자 (마10:28-31)


  미국의 로스앤젤레스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여자가 차를 몰고 고속도로를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달리던 차들이 갑자기 멈춰 섰습니다. 그 여자도 차를 정지시켰습니다. 그리고는 문득 백미러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런데 뒤차가 전혀 정지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달려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차는 전속력으로 돌진해 왔습니다. 그 차의 운전자가 지금 뭔가 딴생각을 하고 있으며, 곧 자기 차를 강하게 들이받으리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죽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순간 여인은 운전대를 꽉 움켜쥐고 있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게 되었습니다. 의식적으로 그렇게 꽉 잡았던 것 아니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한 것이었습니다.

  그 찰나에 여인은 이것이 이때까지 자신이 살아온 방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계속 이런 식으로 살고 싶지 않고, 이런 식으로 죽고 싶지도 않다고 결심하였습니다. 여인은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양손을 내려놓았습니다. 운전대를 놔버린 것입니다. 삶에, 그리고 죽음에 순순히 자신을 내맡긴 것입니다. 곧바로 엄청난 충격이 느껴졌습니다.

  얼마 후 여인은 눈을 떴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놀랍게도 하나도 다치지 않고 멀쩡했습니다. 앞차는 박살이 났고, 뒤차 역시 완전히 부서진 상태였습니다. 자기 차는 그 중간에서 마치 아코디언처럼 구겨져 있었습니다. 잠시 후 경찰이 왔습니다. 경찰은 보기 드문 행운이라면서, 아마도 충돌하는 순간에 몸의 긴장을 풀고 있었던 모양이라고 말했습니다. 근육이 긴장하면 심각한 상처를 입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여인은 큰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다치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것보다 훨씬 큰 것이었습니다. 여인은 자신이 그동안 어떤 식으로 살아왔는지를 알게 되었고, 그것을 바꿀 기회를 얻은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는 늘 주먹을 꽉 움켜쥔 채 살아왔지만, 이제는 손바닥 위에 부드러운 깃털이 놓인 양, 손을 편 채로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두려움을 내려놓으면, 인생을 충분히 누리면서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뒤차가 자기 차를 강하게 들이박게 될 것을 안 순간, 여인은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 순간 여인의 감정은 두려움이었을 겁니다. 그래 자기도 모르게 운전대를 꽉 움켜쥐었을 겁니다.

  움켜쥔다는 것은 무언가에 의존하려는 몸짓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인이 운전대를 움켜쥔 것은 물론 운전대에 의존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전에 운전대를 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 연장선상에서 무언가에 의존하려는 몸짓이 운전대를 더 강하게 움켜쥐는 것으로 나타났을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몸에 힘이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몸은 더 긴장하게 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런 긴박한 와중에서도 자신의 상태를 알아차린 것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두려움으로 뭔가를 움켜쥐는 모습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이 그동안 자신이 살아온 방식이었다는 걸 헤아린 것입니다. 더 나아가 계속 그런 방식으로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그런 상태로 죽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입니다. 이 순간의 심리 상태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운전대를 꽉 움켜쥐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추하게 느껴졌을지 모릅니다. 구차스럽게 느껴졌을지 모릅니다. 자기 존재의 자존심이 상하는 것 같았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런 모습으로 계속 살 수는 없어, 하는 비장한 각오가 생겼을 겁니다. 그리하여 존재의 자존감을 회복시킨 몸짓으로 넘어간 것이 아닐까요? 참 귀한 모습입니다. 그것이 그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을 겁니다.

  뒤차가 박을 것을 알았을 때 운전대를 꽉 움켜쥐는 모습, 그것은 우리 대부분의 모습입니다. 곧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우리는 두려움으로 움츠러듭니다. 그리하여 뭔가를 움켜쥡니다. 그것은 세상의 무언가에 의존하려는 몸짓입니다. 하지만 그래서는 해결책이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종류의 두려움이든 두려움이 있습니다. 두려움은 수시로 찾아오는 불청객입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움츠러듭니다. 주먹을 꽉 움켜쥡니다. 그러면 더 어려운 상황에 빠지게 되는 겁니다. 하지만 그런 원리를 안다고 하여도 움켜쥔 주먹을 펴기는 쉽지 않습니다. 주먹을 펴게 되면 더 두려운 일이 일어날 거 같기 때문입니다. 주먹을 움켜쥐는 것은 두려움 앞에서 자신을 방어하는 최소한의 자구책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결코 자신을 방어해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역효과가 나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손을 펼 수 있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내맡기는 겁니다.

  한 제자가 오랫동안 스승 밑에서 도를 닦았습니다. 그는 이제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하산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한밤중에 그는 스승에게 지금 내려가려고 하는데, 길이 너무 어두우니 마지막으로 촛불을 하나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스승은 촛불을 하나 주었습니다. 그런데 촛불을 들고 방문을 나서는 그에게 스승은 다가가서 그 촛불을 꺼버렸습니다. 난감해진 제자는 이 양반이 왜 이러시나 생각했습니다. 어쨌거나 촛불이 꺼졌으니 망연자실 어둠 속에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참 지나니 시야가 밝아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별빛의 기운으로 시야가 밝아진 것이었습니다. 제자는 비로소 왜 스승이 촛불을 주고 다시 꺼버렸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은 스승 밑에서 다 깨달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진정한 깨달음을 얻은 것입니다. 촛불을 들고서 어둠 속을 계속 갈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바람이 불면 금방 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촛불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별빛에 의지하여 어둠 속을 걸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별빛에 의지하면 충분히 어둠 속을 걸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는 닫힌 방을 향해 마지막으로 스승에게 감사의 큰절을 올렸습니다.

  우리에게 촛불을 끄는 일이 참 어렵습니다. 만약 촛불을 끄게 되면 완전히 깜깜해질 것 같은 두려움이 있는 겁니다. 하지만 촛불을 꺼야 비로소 별빛이 그 빛을 발하는 현상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별빛의 인도를 받으려면 우선 촛불을 꺼야만 합니다. 어떻게 촛불을 끌 수 있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역시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내맡기는 겁니다.

  촛불은 세상의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별빛은 하나님의 힘입니다. 촛불을 그냥 불로, 별빛을 빛으로 바꿔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불의 힘에 의존하여 세상을 사시렵니까? 아니, 빛의 힘에 의존하여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불은 꺼지기 마련이고, 또한 불은 소중한 것을 태워버릴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그러나 빛은 영원히 빛나고, 또한 은은하게 나를 포함한 모든 것을 감싸줍니다.

  나를 낳아 주시고 길러 주신 부모도 언젠가는 나를 떠나십니다. 나를 몹시 사랑하는 배우자도 나를 떠나게 됩니다. 아니면 내가 먼저 배우자를 떠나게 됩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인연에 따라 나를 떠날 수 있습니다. 아니면 내가 그들을 떠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모두 불과 같은 의미를 지니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빛이신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촛불에 의존하는 삶은 주먹을 움켜쥐고 사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별빛에 의존하는 삶은 손을 펴고 사는 것입니다. 손을 펴는 일과 촛불을 끄는 일은 같은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며 하나님의 사랑에 모든 것을 내맡길 때 가능해집니다.

  본문을 봅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몸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를 들면 예수님의 경우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예수님의 영혼을 죽일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겁니다.

  대신 몸과 영혼 둘 다를 지옥에 던져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라고 하십니다. 사실 이 말씀은 오해의 소지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몸과 영혼을 지옥에 던져서 멸망시키지 않으십니다. 이 말씀의 취지는 앞의 말씀과 상대적인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예컨대 로마 군인들은 몸은 죽일 수 있어도 영혼을 죽이지 못하는 한계를 지니지만, 하나님은 한계가 없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말씀의 바른 뜻은 경외하라는 의미입니다. 두려워하는 것과 경외하는 것은 전혀 다른 뜻을 지닙니다.

  다음으로 참새와 머리카락에 대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것은 그러한 작은 것들도 하나님께서 소중히 여기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참새보다 더 귀한 사람이야 오죽 소중히 여기시겠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하나님을 믿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침 지난 주간에 저는 제 카톡 대문의 문구를 바꾸었습니다. 이전의 문구가 제게 거의 체화되어 그 문구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사라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새 문구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깊은 만족, 확실한 도움, 천국이 함께한다는 고요한 확신을 느끼기> 그 문구는 <기적수업>이라는 책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나는 지금 얼마나 깊은 만족을 느끼나, 얼마나 확실한 도움을 느끼나, 얼마나 천국이 함께한다는 고요한 확신을 느끼나를 저 자신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각각 10점을 만점으로 하여 어느 정도의 수치가 되는지를 헤아려 보았습니다. 세 가지의 수치가 모두 제법 높은 상태임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10점 만점에는 이르지 못함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세 가지를 느끼지 못하면 두려워하는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두려워한다면 우상을 만들었고, 그 우상이 자신을 배신할 거라고 믿고 있음을 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세 가지가 모두 10점에 이르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며 하나님의 사랑에 모든 것을 내맡길 때 가능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움켜쥔 주먹을 활짝 펴고 빛이신 하나님께 완전히 의존할 때 가능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이해를 전제로 하여 깊은 만족을 느껴보려 하니, 만족감이 점점 깊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또 확실한 도움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느껴보려 하니, 영육간에 확실한 도움을 받고 있음에 대한 인식이 점점 깊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천국이 함께한다는 고요한 확신을 느껴보려 하니, 천국이 함께한다는 확신이 점점 깊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틈나는 대로 이런 작업을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 어떤 종류의 두려움이든 두려움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될 날이, 우상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될 날이 오리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맨 처음에 전해드린 이야기의 여인처럼, 지금 혹시 어떤 일로 인한 두려움으로 주먹을 꽉 쥐고 있으십니까? 그 여인처럼 더는 이렇게 살지 않겠다는 결심을 해보지 않으시렵니까? 그리하여 그 여인처럼 큰 선물을 받아보지 않으시렵니까?

  여러분, 지금 혹시 촛불을 움켜쥐고 그 촛불에 의존하여 살아가십니까? 촛불을 꺼버리십시오. 그리고 촛불을 움켜쥐었던 손을 활짝 펴십시오. 그러면 잠시 후 별빛이 여러분을 환하게 비추는 놀라운 현상을 체험하시게 될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며 그 사랑에 모든 것을 내맡기시기 바랍니다. 빛이신 하나님께 완전히 의존하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두려움이 점점 줄어들기 바랍니다. 두려움이 점점 줄어드는 만큼 여러분 내면에 평화와 기쁨이 점점 깊어가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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