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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희담
   깊은 물과 같은 마음 (눅18:15-17)


  아주 오래전 이야기입니다. 한 아이가 선물 두 개를 받았습니다. 하나는 아이가 보기에 예쁜 종이와 예쁜 리본으로 곱게 포장된 상자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아이가 보기에 아주 탐스럽게 생긴 사과였습니다. 또한 그 사과는 매우 컸습니다. 아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걸 갖고 있다가 형들과 누나들이랑 나눠 먹을 거야. 나 혼자 먹기엔 너무 커.”

  이어서 아이는 포장된 선물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리본을 아주 조심스럽게 풀었습니다. 그리고는 그걸 잘 접어서 사과 옆에 두었습니다. 왜냐하면 버리기에는 너무 예뻤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포장지를 아주 조심스럽게 뜯었습니다. 그 포장지 또한 정말로 예뻤습니다. 역시 포장지를 잘 접어 리본 옆에 두었습니다. 아이는 말했습니다. “이 포장지는 너무 예쁜걸. 난 이걸 잘 보관할 거야.” 드디어 아이가 상자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상자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포장을 뜯는 과정에서 이미 충분한 행복감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포장을 푸는 아이의 동작 하나하나에 정성이 깃들어 있습니다. 포장을 할 때 정성이 깃들 수는 있지만, 포장을 풀 때 정성이 깃드는 모습은 좀 낯설 정도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경우 대체로 어떻게 합니까? 리본이나 포장지가 예쁘다 하더라도 마음은 상자 안에 가 있을 겁니다. 그래 서둘러 포장을 뜯을 겁니다. 어쩌면 무엇이 상자 안에 있을까 궁금하여, 리본이나 포장지가 예쁘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이가 리본과 포장지를 예쁘다고 인식한 것부터가 귀한 일입니다. 예쁘다고 인식하는 것은 주관적 현상입니다. 같은 꽃을 보고서도 어떤 사람은 예쁘다고 인식하지만, 또 어떤 사람은 예쁘다는 인식을 못 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 리본과 포장지가 아이가 보기에 예뻤던 겁니다. 그리고 아무리 예뻐 봤자 그것은 껍데기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속의 내용물입니다. 그런데도 껍데기인 리본과 포장지를 그렇게 정성스럽게 대하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마치 리본과 포장지가 그 자체로 선물인 양 그것들을 잘 보관해 둔 것입니다.

  문제는 상자 안에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 같으면 실망하거나 얼굴을 찡그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과정에서 충분한 행복감을 느끼면, 결과가 어떠하든 실망하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요?

  이런 아이이기 때문에 탐스럽게 생긴 사과를 금방 먹지 않았을 겁니다. 우선 탐스럽다는 것도 아이의 주관적 인식입니다. 탐스럽다는 말은, 마음이 끌리도록 보기에 좋은 데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예쁘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이는 사과도 예쁘게 생겼다고 인식한 것입니다. 리본과 포장지를 예쁘다고 인식한 그 마음이 사과도 예쁘다고 인식하게 했을까요? 또한 사과가 크면 얼마나 크겠습니까? 설마 수박만 한 사과는 아니었겠지요? 그런데 너무 크다며 나중에 형제들과 나눠 먹겠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일반적으로 먹을 것이 탐스럽다고 인식하면 더 먹고 싶은 법인데, 아이는 형제들과 나눠 먹기 위해 사과를 먹지 않았습니다.

  두 가지 선물을 대하는 아이의 모습에서 그의 마음이 아주 깊은 상태임을 느끼게 됩니다. 마음이 얕은 상태이면, 무언가에서 예쁨을 인식할 마음의 눈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누군가에 대해 배려하는 마음을 갖기도 어렵고, 또한 마음이 퍽 바쁘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리본과 포장지 그리고 사과에서 예쁨을 인식할 수 없고, 형제를 배려할 수 없고, 마음이 바쁘기 때문에 당장 사과를 먹게 될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전해준 사람은 끝에 이런 말을 덧붙였습니다. “없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아이가 마지막으로 만난 상황은, 상자 안에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모습을 만난 일이었습니다. 곧 <없음>을 만난 것입니다. 그때 그 <없음>에 마음을 쏟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실망, 허탈, 짜증, 분노 등이 되겠지요. 그런데 아이는 <없음>에는 마음을 두지 않았습니다. 아이는 그 전의 <있음>에 주의를 기울였던 겁니다. 곧 리본과 포장지가 예쁘다고 인식했는데, 그걸 예쁨이 있음을 인식한 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쁘지 않다고 인식한다면 예쁨이 없음을 인식한 셈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예쁨이 있음을 인식한 아이는 그 예쁨에 감탄하며 정성스레 포장을 풀었던 겁니다. 그리고는 그것들을 잘 보관해 둔 겁니다. 달리 말하자면 과정에 주의를 기울인 것입니다. 과정 자체가 아이에게 선물이 되었던 겁니다. 과정 자체에서 선물의 가치를 넉넉히 누렸기에, <없음>의 상황을 만났을 때 실망치 않았던 겁니다. 그러니까 이야기를 전해준 사람의 말은, 과정을 중시하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과정에는 무언가가 늘 있으니까요. 정신만 차리고 있으면 과정에 있는 무언가를 만날 수 있으니까요.

  우리는 대체로 결과를 중시합니다. 다시 말해서 목표의 성취를 중시하는 겁니다. 자신이 세운 목표가 성취되면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조심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곧 목표의 성취를 위해 그 과정을 소홀히 하는 겁니다. 목표의 성취는 현재 <없음>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목표의 성취를 향해 가는 과정에는 늘 <있음>이 있습니다. 그 <있음>을 소홀히 하고, 아직 <없음>에만 에너지를 쏟게 되면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이를 다르게 말하면 현재를 살라고 하는 겁니다. 미래는 아직은 <없음>이고, 현재는 <있음>입니다. 없음은 거지와 같은 상태이고, 있음은 부자와 같은 상태입니다. 따라서 끝없이 이어지는 현재에서 <있음>을 보면, 마음이 부자가 되어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컨대 등산을 갑니다. 물론 목표는 정상에 오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상에 오르는 것을 위해, 올라가는 과정이 소홀해질 수 있다는 겁니다. 도중에서 만나는 나무의 아름다움, 새소리, 계곡 물소리, 꽃들의 향기 등을 제대로 만나지 못하는 겁니다. 그런 것들이 바로 현재의 <있음>입니다. 그리고 정상은 아직 <없음>입니다. 언젠가 정상에 올라 거기서 <있음>을 만나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 과정에서 만나는 현재의 <있음>을 누리는 것이 우선이라는 겁니다. 그러다 설령 정상에 이르지 못한다 하더라도 아무 문제가 안 되는 겁니다. 목표가 성취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별로 아쉬움이 없는 겁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이의 것이라고 하십니다.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할 거라고 하십니다. 어린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요? 그 답을 앞에서 소개해 드린 아이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저는 그 아이의 이름을 예수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곧 이 이야기가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일어났던 일이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다만 받은 선물 중 하나는 무화과였는데, 그게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 과정에서 사과로 바뀐 거로 이해해 보았습니다. 만약 그 아이가 예수님이 어렸을 때의 모습이라고 하면, 그 아이의 반응이 실제로 가능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열두 살 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전했는데,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아이의 슬기에 경탄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 이야기와 같은 반응도 예수님이라면 충분히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은 아이 때 이미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주셨다고 생각해 보는 겁니다. 물론 그건 저의 소설입니다.

  여러분, 목표를 세우십시오. 그리고 그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십시오. 다만 그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것들에 예쁨이 있음을 인식하고, 그 예쁨을 즐거이 잘 누리십시오. 과정에서 만나는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미소 지으십시오. 그러다 목표를 성취하게 되면 기쁠 것입니다. 하지만 목표를 성취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과정을 잘 누렸다면 결코 아쉬움이 남지 않을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에게 이런 모습이 있습니다. 열심히 노력하여 목표를 성취하였습니다. 그런데 왠지 충족감이 별로 없는 겁니다. 허탈감으로 다른 목표를 세우고 열심히 노력하여 정상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역시 기대한 만큼의 충족감이 없는 겁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노인이 되는 겁니다. 그는 이 모든 과정에서 즐거움을 제대로 누려보지 못하였습니다. 인생의 마지막에 남는 것은 허탈감뿐입니다. 이런 모습이 결코 드물지 않다는 걸 여러분이 아실 겁니다.  

  현재는 <있음>입니다. 그 <있음>을 잘 만나고 잘 누려야 합니다. <있음>을 사랑해야 합니다. 현재의 <있음>을 소홀히 하고, 지금은 <없음>인 미래에 모든 에너지를 쏟는 인생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들판에서 만난 나비가 너무 예뻐서 그 나비에 취해 나비 따라가다 길을 잃는 아이, 그런 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십니다.

  제가 얼마 전에 어떤 분으로부터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 선물은 어떤 약이었는데 제가 필요로 하는 것이기에 기뻤습니다. 그리고 선물을 보내준 분에게 감사를 느꼈습니다. 그러다 이번 주 설교를 준비하면서 앞에서 말씀드린 아이가 선물을 대하는 모습을 보고, 제가 선물을 받고 반응한 모습과 비교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의 모습은 아이의 모습만큼 깊은 마음이 아니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보관해두었던 그 선물을 꺼내 들고 다시 반응해 보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선물만 보는 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보내준 분의 사랑을 더욱 깊이 느껴보았습니다. 그러자 감사하는 마음이 더욱 깊게 느껴졌습니다. 더 나아가 평소 제가 선물을 받았을 때 반응하는 모습들을 떠올리며, 앞으로는 더욱 깊은 마음으로 반응하기를 다짐하였습니다. 그 아이의 자세를 잘 배워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도종환 시인이 지은 <깊은 물>이라는 시를 읽어드리겠습니다. <물이 깊어야 큰 배가 뜬다/ 얕은 물에는 술잔 하나 뜨지 못한다/ 이 저녁 그대 가슴엔 종이배 하나라도 뜨는가/ 돌아오는 길에도 시간의 물살에 쫓기는 그대는// 얕은 물은 잔돌만 만나도 소란스러운데/ 큰 물은 깊어서 소리가 없다/ 그대 오늘은 또 얼마나 소리치며 흘러갔는가/ 굽이 많은 이 세상 이 시냇가 여울물>

  시인은 깊은 물과 얕은 물을 대비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깊은 강이라고 하는 아프리카의 콩고강처럼 깊은 물에는 큰 배가 뜹니다. 그런데 얕은 물에는 술잔 하나 뜨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런 얕은 물은 잔돌만 만나도 소란스럽습니다. 하지만 깊은 물은 소리가 없습니다. 시인은 우리에게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깊은 물과 같은 상태인지를 묻습니다. 혹시 시간에 쫓겨 살며 종이배도 제대로 뜰 수 없는 얕은 물 상태는 아닌지, 작은 일에도 비명을 지르며 흘러가고 있지는 않은지 묻습니다. 한편 여울은 강이나 바닥이 얕거나 폭이 좁아 물살이 빠르게 흐르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여울물은 얕으면서도 빨리 흘러가는 물입니다. 그런 시냇가 여울물처럼 얕고, 여유가 없고, 소란스러운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묻습니다. 참 귀한 통찰을 담고 있는 시입니다.

  이러한 개념으로 보자면, 아이의 마음은 아주 깊은 물의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은 그렇게 깊은 물의 상태가 아님을 알아차린 것입니다. 그래서 깊은 물과 같은 마음이 되도록 이끌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얕은 물과 같은 마음은 여유가 없이 늘 바쁩니다. “빨리빨리”를 입에 달고 살아갑니다. 일희일비하며 소란스럽습니다. 타인을 배려하는 일도 어렵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과거와 미래를 왔다 갔다 하면서 주로 <없음>, 곧 결핍을 봅니다. 그러나 깊은 물과 같은 마음은 여유롭습니다. 느릿느릿 유유히 흘러갑니다. 고요합니다. 형제를 사랑으로 배려합니다. 그리고 현재에서 <있음>, 곧 충만을 봅니다. 어쩌다 누군가로부터 선물을 받게 되면, 그 선물이 자기가 원했던 선물이든 별로 원하지 않았던 선물이든, 그 선물에 예쁨이 있음을 인식하며 미소 짓습니다. 그리고 선물을 보내준 사람의 마음을 깊이 만나며 깊은 감사를 느낍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점점 깊어지시기 바랍니다. 콩고강처럼 깊은 물, 아니 태평양처럼 깊은 물과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실 수 있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현재에서 <있음>을 보며 풍요로운 마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또한 그 <있음>을 주변 형제들에게 사랑으로 베푸는 아름다운 삶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

주님,
자기 안에 있는 것을 밖에서 보게 된다고 합니다.
곧 내면에 있는 것을 밖에 있는 사물을 통해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면이 아름다운 사람은 밖에 있는 모든 사물에서 예쁨을 인식합니다.
내면이 깊은 물과 같은 사람은 밖에 있는 타인의 마음을 깊이 만납니다.
내면이 영으로 충만한 사람은 밖에 있는 무엇을 보더라도 <있음>을 봅니다.
그는 과거와 미래를 배회하지 않고 현재를 미소 지으며 살아갑니다.
그런 내면의 중심에는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와 하나 된 작은 그리스도로서
사랑과 평화를 구가하며 유유히 흘러가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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