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동 로 그 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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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희담
   나는 파란 마음의 영이다 (마26:47-54)


  알렉산더 대왕이 인도 정벌을 위해 군사를 이끌고 가는 중이었습니다. 도중에 디오게네스라는 현인을 만났습니다. 그는 강가에서 벌거벗은 몸으로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이러저러한 대화를 나누다가 디오게네스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어딜 가는 중이오?” 알렉산더 대왕이 말했습니다. “나는 전 세계를 정복하기 위해 인도로 가는 중입니다.” 디오게네스가 다시 물었습니다. “전 세계를 정복한 다음에는 무얼 할 생각이오?” 알렉산더 대왕이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습니다. “그다음에는 쉴 것입니다.” 디오게네스가 크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당신 미쳤구려. 나는 세계를 정복하지 않았지만 지금 아주 편안히 쉴 수 있소. 당신의 궁극적 목적이 편안히 쉬는 거라면 왜 지금 쉬지 못하는 거요? 누가 당신에게 쉬기 위해서는 세계를 정복해야만 한다고 말했소? 지금 쉬지 못한다면 당신은 영원히 쉬지 못할 거요.” 알렉산더 대왕은 디오게네스의 말을 가슴에 깊이 새기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 이 행군을 멈출 수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걸은 길은 강자의 길입니다. 그 길을 걷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짓밟아서라도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려고 합니다. 한편 그런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약자가 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입니다. 그 두려움 때문에 다른 사람을 짓밟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강자의 길을 걷는 사람에게는 이런 욕망과 이런 두려움이 있는 겁니다.

  어느 점잖은 대학교수가 파티에서 술을 많이 마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어떤 실수를 하였습니다. 그래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그는 생전 처음으로 하룻밤을 경찰서 유치장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그 후로부터 그는 사람이 변했습니다. 경찰만 보면 숨는 겁니다. 그렇게 6개월을 보냈습니다. 지친 그가 친구를 찾아가서 자신을 숨겨달라고 말합니다. 친구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그가 대답했습니다. 경찰이 늘 자기를 미행한다고, 자기를 다시 잡아가려고 한다고, 경찰서에 가면 자신에 대한 파일이 수북하다고 말입니다. 또한 학교 학생들도 경찰의 스파이가 되어 자신을 감시한다고 말입니다. 친구가 그렇지 않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친구 집에서 며칠을 지냈지만 그의 망상은 날로 더하여 갔습니다.

  친구가 묘안을 생각해 냈습니다. 친구는 경찰을 찾아가서 사정을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두툼한 조서 뭉치를 갖고 우리 집에 와서, 자기 친구를 무조건 두들겨 패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경찰이 친구의 부탁대로 가짜 조서 뭉치를 갖고 그 집에 갔습니다. 그리고는 무조건 그를 두들겨 팼습니다. 친구가 보니까, 그는 매를 맞으면서 매우 행복해하였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내 판단이 결코 망상이 아니야, 내 말이 맞지, 하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친구가 그에게 돈이 얼마나 있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10만 원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친구는 그 돈을 자기에게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그 돈을 받아 그 자리에서 경찰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대가로 경찰은 조서 뭉치를 그 자리에서 소각하였습니다. 경찰이 돌아가 후 그는 정상으로 회복되었습니다.

  이 대학교수가 걸은 길은 약자의 길입니다. 그 길을 걷는 사람에게는 짓밟히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자기 몸의 보존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한편 그런 사람에게는 강자가 되고픈 욕망이 있습니다. 약자의 길을 걷는 사람에게 이런 욕망과 이런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인생은 강자의 꿈과 약자의 꿈으로 이뤄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강자의 욕망과 두려움, 그리고 약자의 욕망과 두려움으로 세상사가 펼쳐지는 것입니다. 강자는 약자로 떨어질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고, 약자는 강자가 되고픈 욕망을 가집니다. 또한 강자는 약자를 짓밟으려는 욕망을 갖고 있고, 약자는 강자에게 짓밟힐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습니다.

  강자와 약자가 욕망의 성격은 달라도 욕망을 가진다는 점에서 같습니다. 또한 두려움의 성격은 달라도 두려움을 가진다는 점에서 같습니다. 그러니까 강자와 약자는 똑같이 욕망과 두려움을 가지는 겁니다. 그 말은 강자와 약자가 똑같이 자신을 약한 존재로 여긴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자신을 약한 존재로 생각하기에 욕망을 가지고 또한 두려움을 가지는 겁니다.

  강자는 과장된 자아의식을 가집니다. 자기가 대단한 힘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혹은 자신이 많은 지식을 가졌거나 관대하거나 남에게 도움을 많이 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우월감으로 나타납니다. 반면에 약자는 왜소한 자아의식을 가집니다. 자기가 힘이 별로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혹은 깊은 피해 의식을 가집니다. 그것이 열등감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엄밀히 보자면 강자는 과장된 자아의식 아래 왜소한 자아의식을 감추고 있습니다. 과장된 자아의식은 수면 위의 의식이고, 왜소한 자아의식은 수면 아래 의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월감으로 살아가면서도 때로 열등감에 시달립니다. 약자 역시 왜소한 자아의식 아래 과장된 자아의식을 감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열등감으로 살아가면서도 때로 어울리지 않는 우월감을 드러내 보입니다. 그러므로 강자와 약자는 똑같이 과장된 자아의식과 왜소한 자아의식을 가지는 겁니다. 다만 수면 위의 의식과 수면 아래의 의식이 서로 바뀌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이런 두 가지 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3의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을 영성인의 길이라고 부르겠습니다.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의 모습은 어떠할까요?

  어떤 최면사가 내담자에게 최면 시술을 하였습니다. 어린 나이로 퇴행을 하는 작업을 몇 차례 하였습니다. 그러다 한 번은 엄마 배속의 태아로 가면 어떻게 되나를 실험하였습니다. 최면사는 내담자를 엄마의 자궁 안에 있을 때로 유도하였습니다. 근데 어쩌다가 엄마의 자궁으로 오기 전의 영계로 간 것입니다. 그는 빛으로 꽉 찬 공간에서 자신이 흐르고 있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 느낌은 너무도 황홀한 것이었습니다. 그때 최면사가 현실로 돌아오라고 말했습니다. 현실로 돌아온 그는 펑펑 울었습니다. 최면사는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자신이 본시 찬란한 빛의 존재인데, 몸을 입고 세상에 와서 초라하게 살고 있는 것이 너무 안타깝게 느껴졌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영성인이란 본시 자신이 찬란한 빛의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그런 존재의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디오게네스가 그런 사람이었을까요? 그에게 강자의 꿈이나 약자의 꿈은 없습니다. 그에게는 어떤 종류의 욕망도 없습니다. 남을 짓밟으려는 욕망도 없고, 강자가 되려는 욕망도 없습니다. 또한 어떤 종류의 두려움도 없습니다. 약자로 떨어질 것에 대한 두려움도 없고, 강자에게 짓밟힐 것에 대한 두려움도 없습니다. 그는 욕망이나 두려움 대신 사랑과 평화로 살아갑니다.

  우리는 제3의 길의 모범을 예수님에게서 발견합니다. 예수님은 무한한 힘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곧 강한 존재로서 사셨습니다. 하지만 그 힘을 강자의 길을 걷는 사람처럼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읽은 마태복음은 예수께서 잡히시던 때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 하자, 제자 중 한 사람이 칼로 대제사장의 종을 내리쳐서 그의 귀를 잘랐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쓰는 사람은 칼로 망한다. 너희는 내가 내 아버지께 당장에 열두 군단 이상의 천사들을 내 곁에 세워 주실 것을 청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예수님은 상징적인 표현이겠지만 열두 군단 이상의 천사들을 불러올 수 있는 힘을 갖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힘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다른 식으로 힘을 사용하셨습니다. 같은 내용을 기록한 누가복음을 보면, 예수께서 귀가 잘려 나간 사람의 귀를 다시 붙여주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강한 힘을 적을 공격하는 데 사용하지 않고, 적이 입은 상처를 치유하는 데 사용하신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자의 길을 걷는 사람 중에 자신이 가진 힘을 부당하게 사용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특히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그 힘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부당한 방법으로 사용하는 겁니다. 예전에 최순실 씨가 바로 그런 경우였는데, 요즘 최순실 씨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권력을 부당하게 사용하는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또 아버지와 자녀 관계에서 아버지는 강자고 자녀는 약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자녀를 수시로 구타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습니다. 또 남편이 아내를 구타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습니다. 가족 간에도 힘을 부적절하게 사용하는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 당신이 가지신 무한한 힘을 바르게 사용하시는 모습은 우리에게 귀감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약자의 처지가 되었을 때가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는 사람들을 강자로, 그들에 의해 죽임당하는 예수님을 약자로 생각해 보는 겁니다. 그때 예수님은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의 용서를 빌었습니다. 약자의 처지가 된 것처럼 보일 때 진정한 강자처럼 반응하신 겁니다. 용서는 강자 곧 내면에 강한 힘이 있는 사람에게 가능한 일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압니다.

  진정한 영성인이란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 길은 강자의 길도 아니고 약자의 길도 아닙니다. 그 길은 제3의 길입니다. 그 길은 진정으로 강한 존재로서 살아가는 길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되었을 때의 그 모습 그대로를 살아가는 길입니다. 사랑과 권능을 지닌 존재로서 살아가는 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길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바른 마음을 선택하여 살면 됩니다. 그른 마음과 바른 마음 중에서 바른 마음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른 마음을 선택하면 두 길이 나타납니다. 강자의 길과 약자의 길입니다. 그 둘이 형태는 정반대인 거 같지만, 자신을 약한 존재로 여긴다는 점에서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그른 마음을 선택하게 되면, 강자의 길을 걷는 약한 존재가 되든지 약자의 길을 걷는 약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른 마음을 선택하면 진정으로 강한 존재의 길을 걷게 됩니다. 강자의 길이 과장된 자아로 약자의 길이 왜소한 자아로 살아간다고 했는데, 그것은 거짓 자아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른 마음으로 살아갈 때 참 자아로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사람은 마음과 몸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일체유심조’라는 말은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그 말은 마음이 모든 것을 지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몸은 마음의 지시를 수행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컨대 흔히 뇌가 판단하고 기억하고 결정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뇌는 마음의 지시를 충실히 따를 뿐입니다. 노인이 되어 치매에 걸리는 것은 뇌가 손상된 결과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마음의 결정에 따라 나타난 현상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 그것이 사실입니다. 어쨌든 나는 모든 것을 결정하는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음인 내가 몸을 사용하여 세상을 살아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행복을 결정하면 행복하게 살게 되고, 불행을 결정하면 불행하게 살게 됩니다. 마음이 병을 결정하면 병든 몸으로 살게 되고, 건강을 결정하면 건강한 몸으로 살게 됩니다. ‘일체유심조’라는 말의 바른 뜻은 그것입니다.

  그런데 그른 마음의 거짓 자아는 자신을 마음이 아닌 몸으로 여깁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 다만 그른 마음은 불행과 병든 몸을 결정한다는 사실만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인생을 고통의 바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그른 마음이 주도하는 인생을 가리킵니다. 한편 바른 마음의 참 자아는 자신을 마음 혹은 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속성대로 창조된 나도 영인 것입니다. 나는 몸이 아닌 마음이다, 몸이 아닌 영이다, 이것이 진실입니다. 또한 바른 마음은 행복과 건강한 몸을 결정합니다. 그러므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어떻게 해서든지 바른 마음을 선택하는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돈을 많이 버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생각은 그의 그른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하지만 설령 그가 돈을 많이 벌었다 하더라도, 그의 그른 마음이 불행과 병을 결정했을 터이니 그는 고통으로 인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이상을 전제로 하여 제가 평소에 바른 마음을 선택하는 방법을 두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는 바른 마음을 파란색이라고 생각하고, 수시로 파란 색깔의 기운에 감싸이는 겁니다. 저는 그른 마음을 빨간 마음, 바른 마음을 파란 마음으로 바꿔서 생각합니다. 제 경험상 그냥 바른 마음을 선택하겠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파란 색깔의 기운에 감싸이는 것이 더 나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또 파란 하늘을 보게 되면 파란 마음을 떠올리기도 합니다. 관건은 바른 마음 선택을 기억하는 일이기 때문에, 성령께 바른 마음 선택을 기억하게 도와달라고 청하기도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바른 마음에 색깔을 입히는 방법을 사용해 보신다면 여러분 마음에 드는 색깔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수시로 “나는 몸이 아니라 영이다”라고 확언하는 겁니다. 그리고 내가 영이라는 인식이 점점 깊어가게 도와달라고 청합니다. 내가 몸이라는 생각에 익숙하기 때문에, 영으로 인식하려는 일은 성령의 도움이 없으면 거의 불가능할 거로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걸으셨던 제3의 길을 선택하기를 뜻하시기 바랍니다. 수시로 바른 마음 선택을 기억하여, 참 자아인 강한 존재로서 살아가기를 뜻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점점 자신의 내면에 힘이 자라나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 힘을 예수님처럼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사랑을 이웃에게 베푸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영성인의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

주님
강자와 약자는 사실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곧 내가 A에게는 강자이지만 B에게는 약자가 될 수 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는 약자지만 자기 동생에게는 강자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고정된 강자로 사는 사람도 없고, 고정된 약자로 사는 사람도 없습니다.
곧 우리 안에는 강자의 모습과 약자의 모습이 함께 있는 겁니다.
그래서 누구나 강자의 처지가 되었을 때 그 힘을 부당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강자와 약자의 모습으로 살지 않고 제3의 길을 걸어가기를 뜻합니다.
바른 마음 선택을 위해 노력하여 점점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기를 뜻합니다.
자신이 파란 마음의 영이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 점점 깊어가도록 도와주옵소서.
그리하여 태초에 하나님이 주신 무한한 힘을 예수님처럼 사용하여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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