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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희담
   사실과 해석 (마26:39-46)


  갑순이가 식당에서 여자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한 여자가 칸막이 문을 열고 나왔습니다. 갑순이가 그 여자가 나온 칸막이로 들어가 문을 닫자, 여자는 밖에서 노래를 부르며 손을 씻기 시작했습니다. 갑순이는 그 여자의 목소리가 참 곱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갑순이는 변기의 앉는 자리가 흠뻑 젖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갑순이는 짜증이 났습니다. “누가 이런 짓을 한 거지?” 하지만 방금 여기서 나간 여자 말고 다른 사람이 있을 수 없습니다. “대체 저 여자는 어떻게 받침대에 온통 소변을 묻혔지?” 이어 그 여자가 실은 남자일 거라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여자 화장실에서 가성으로 노래하는, 여자 옷을 즐겨 입는 변태성욕자라고 말입니다. 남자라야 서서 소변을 보며 받침대에 흘릴 수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니까 더욱 불쾌해지는 겁니다. 씩씩거리며 변기 받침대를 휴지로 닦으면서 그에게 온갖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그런데 소변을 다 보고 변기 물을 내리자, 변기통에서 물이 솟구쳐 받침대 위까지 넘쳐흐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금방 물이 빠지는 겁니다. 갑순이는 비로소 사태를 온전히 파악하였습니다. 민망한 마음에 그저 웃음이 나왔습니다.  

  이 이야기는 어떤 여자분이 실제로 경험한 것을 고백한 내용입니다. 문제는 변기통이었습니다. 변기통이 고장이었던 겁니다. 아마도 앞의 여자는 그걸 몰랐던 모양입니다. 물을 내리고 그냥 나간 겁니다. 그럴 수 있죠. 그러니까 여유 있게 노래까지 부르면 손을 씻었겠지요. 그런데 갑순이는 물을 내리고 나가기 전에, 우연히 변기통의 물이 솟구쳐 올라오는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때 자신에 대해 얼마나 민망하고 부끄러웠겠습니까? 아무 죄 없는 사람에게 온갖 비난을 퍼부었고, 심지어는 그이가 변태성욕자인 남자일 거라는 소설까지 썼으니 말입니다.

  이런 현상을 우리는 오해라고 말합니다. 오해란 사실과 다르게 이해한 것입니다. 판단의 오류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늘 판단하면서 살아갑니다.  판단할 때 누구나 바른 판단을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판단이 옳을 거라고 믿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근거도 갖고 있는 겁니다. 그러다 나중에 판단이 틀렸음을 알게 되면, 오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부끄러워하게 됩니다.

  그런데 자신의 판단이 틀렸는데도 그걸 알지 못하고 넘어가는 경우도 많습니다. 나중에 오해임을 알게 되는 것은 은총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갑순이가 우연히 변기통의 고장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계속 그 여자에 대한 비난을 안고 살았을 겁니다. 화장실에서 만난, 몹시 불쾌했던 변태성욕자 남자 사건을 죽을 때까지 마음에 품고 살았을 겁니다. 그것은 갑순이가 작은 어둠을 평생 마음에 품고 살게 되는 일입니다. 대부분의 오해는 마음에 작은 어둠을 남기기 때문에, 오해했음을 알게 되는 것이 은총이 될 수 있는 겁니다. 그런 은총을 입지 못하고, 끝까지 잘못 판단한 것을 모른 채 작은 어둠을 안고 사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고 계십니까?

  한편 상대방에 대한 감정이 안 좋을 때는 그에 대한 오해가 더 많아지는 법입니다. 부정적 선입견은 더 많은 오해를 낳습니다. 그 오해에 근거하여 그에게 온갖 비난을 퍼붓게 됩니다. 만약 상대방이 나의 비난에 대해 알게 되면, 상대방 역시 나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갖게 됩니다. 그러면 상대방 역시 나에 대한 오해가 많아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오해에 근거하여 나에게 비난을 퍼붓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관계를 이어갑니다. 오해, 곧 판단의 오류라는 문제가 인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큽니다.

  한편 판단의 오류는 사람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 대해서도 똑같이 일어납니다. 예컨대 어떤 상황을 만났는데 그것을 불행한 일이라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불행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후에, 그것이 은총의 씨앗이었음을 알게 되는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는 섣불리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현실을 있는 그대로 말갛게 받아들이는 겁니다. 아무리 부당하고 불합리해 보이는 현실이라 하더라도 그 현실과 다투지 않는 겁니다. 현실과 다투어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언제나 자기가 져서 손해를 입게 됩니다. 따라서 현실과 다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 현실을 사랑하는 겁니다. 그 현실에 감사하는 겁니다. 자신이 원치 않는 현실이라 하더라도 말이죠. 모든 현실은 배움을 위해 스스로 선택한 것임을 헤아릴 수 있으면 더욱더 좋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을 타고 전쟁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적들을 자세히 보니 모두 자기의 친척들이었습니다. 그 전쟁은 왕위쟁탈전이었습니다. 서로 왕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친척들끼리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부관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도저히 싸울 수가 없다. 내가 어찌 친척들을 죽일 수 있겠는가?” 물러서려고 하는 그에게 부관이 말했습니다. “타인을 죽이는 자가 자신이 정말 타인을 죽이는 줄로 알면 모르는 것입니다. 또한 죽는 자도 정말 자신이 죽는 줄 알면 모르는 겁니다. 운명이 혈육과 싸울 자리를 마련해 준 것입니다. 주어진 현실을 담담히 맞이하여, 미움 없이 두려움 없이 그저 배운 무술을 연마할 뿐이라는 자세로 싸우십시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강자는 전쟁을 일으킵니다. 그런데 그보다 한 차원 높은 사람은 전쟁을 반대합니다. 평화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한 차원 더 높은 수준이 있다는 겁니다. 그는 기꺼이 전쟁을 합니다. 자신이 상대방을 죽이더라도 죽이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자신이 죽더라도 죽는 것이 아님을 알면서 말입니다. 그저 운명이 이런 현실을 마련해 주었음을 알고 그 운명에 순응하는 자세로 말입니다. 미움 없이 두려움 없이 전쟁에 임하는 겁니다.

  이 이야기는 인도의 경전 <바가바드 기타>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바가바드 기타>는 인도인의 정신적 지침서일 뿐만 아니라, 인류의 중요한 종교적 고전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에 나오는 부관은 인도의 성자 크리슈나입니다. <바가바드 기타>는 왕자인 아르주나와 그의 스승이자 부관인 크리슈나가 나눈 대화를 기록한 책입니다. 사실 이 이야기에서 말하는 전쟁은 자기 내면에서 일어나는 전쟁을 가리킵니다. 거짓된 자아인 에고와의 전쟁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바가바드 기타>는 매우 깊은 가르침을 전하는 책이지만, 오늘은 주어진 상황에 순응하라는 가르침만을 말씀드립니다.

  갑순이의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갑순이는 변기의 앉는 자리가 흠뻑 젖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정황에서 그것이 방금 나간 여자와 상관이 있을 거라는 생각까지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갑순이는 받침대의 그 물이 그 여자의 소변일 거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자가 소변을 보면서 받침대에 흘리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기에, 그가 남자일 거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남자는 서서 소변을 보니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방금 마주친 사람이 여자임을 눈으로 확인했기에, 할 수 없이 그이가 여자 옷을 즐겨 입는 변태성욕자인 남자라고 소설을 쓴 것입니다. 그 여자의 고운 노래 목소리는, 남자가 가성으로 부른 거라고 꿰맞춘 겁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어떤 결론을 내리고, 모든 정황을 그 결론에 억지로 꿰맞춘 겁니다.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나가면서, 자기 나름대로는 완벽한 소설 하나를 완성한 것입니다. 그런데 창작의 기쁨을 누린 것이 아니라 고통을 겪은 것이지요. 없는 사실을 만들어내고는 스스로 부정적인 마음 상태에 퐁당 빠져 허우적댄 것입니다.

  갑순이는 이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변기 받침대에 물이 묻어 있는 것을 발견한 순간 거기서 멈추는 겁니다. 방금 나간 여자와 상관성이 있을 거라는 생각까지는 좋습니다. 하지만 그 원인을 분석하려고 에너지를 사용하지 않는 겁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자세로 임하는 겁니다. 그냥 받침대에 물이 묻어 있네, 라고 담담하게 보는 겁니다. 그리고는 그 물기를 휴지로 닦는 겁니다. 이어 소변을 보고 그리고 물을 내리면 됩니다. 그때 비로소 받침대에 물이 묻어 있는 원인을 알게 됩니다. 원인을 분석하려고 헛되이 애쓰지 않아도, 시간만 지나면 저절로 알게 되는 겁니다.

  갑순이의 이 이야기는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바로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니까 말이죠. 이런 식으로 오해와 착각으로 상대방을 판단하고, 화를 내며 상대방에게 온갖 비난을 퍼붓고, 자신은 부정적인 마음에 빠져 고통당하는 겁니다. 우리의 인생이 이런 모습으로 진행된다는 겁니다. 우리들 고통의 현주소가 바로 이것이라는 겁니다.

  본문을 봅니다. 예수께서 죽음을 코앞에 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장면입니다. 총 세 차례 기도하셨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나의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죽음을 피하고픈 자신의 뜻을 고백하신 겁니다. 그러나 곧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라고 말씀하십니다. 주어지는 상황에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이겠다는 겁니다. 두 번째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나의 아버지, 내가 마시지 않고서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는 것이라면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자신의 뜻은 이미 사라졌습니다. 처음보다 좀 더 담담해지신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세 번째도 같은 내용으로 기도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담담히 받아들이겠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상황에 해석을 붙이지 않고 그냥 받아들이셨습니다. 심지어는 죽음조차도 말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 앞에 어떤 상황을 제공합니다. 그때 자신의 판단으로 추리소설을 쓰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는 것, 그 상황에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마음의 평화는 이러한 수용의 자세가 얼마나 되는가에 달려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럴 수 있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하나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더 나아가 모든 현실은 배움을 위해 자신이 만든 거라는 고차원적 인식이 필요합니다. 그런 것을 전제로 하여 판단을 붙이지 않는, 주어진 상황을 따뜻하게 포용하는 부단한 연습을 하는 겁니다. 판단하면 내면이 소란스럽지만, 상황을 포용하면 고요한 마음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런 과정을 잘 밟아 나가서 여러분이 나날이 평화로운 마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

주님,
실제로 발생한 일 자체를 ‘사실’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사실에 판단을 가하는 것을 ‘해석’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실만으로는 분노할 수 없습니다.
그 사실을 부정적으로 해석할 때 비로소 분노의 감정이 생깁니다.
그 분노가 어떤 경우에는 가벼운 짜증의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고,
또 어떤 경우에는 폭력적인 생각을 동반한 격노의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형태로 나타나든 그 분노가 두려움의 근본 원인이 됩니다.
따라서 사실을 접하고서 해석을 가하지 않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앞의 이야기에서 여인은 변기 받침대에 물이 묻어 있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냥 고요한 마음으로 물을 닦아내고 소변을 보면 끝납니다.
그런데 여인은 변기 받침대에 물이 묻어 있는 사실에 해석을 가하였습니다.
그 해석은 어마어마한 소설로 발전했습니다.
그 결과 분노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그이의 감정은 시궁창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실을 접하고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해석하지 않는 자세,
그것이 행복을 위해 매우 중요한 일임을 알고
그런 자세로 살아가려는 목표를 확고히 세우도록 도와주옵소서.
한편 그 목표 달성은 우리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성령께 도움을 간절히 요청합니다.
성령의 도움을 받아 해석과 판단과 기대가 차츰 줄어들어
내면의 평화와 고요가 점점 깊어지도록 인도해 주옵소서.
그 복된 길에 대한 희망이 점점 커가도록 이끌어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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