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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희담
   I love You (창50:15-26)


  아버지와 아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기 몫의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하였습니다. 아들은 아버지한테 받은 돈을 갖고 먼 지방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방탕하게 살면서 그 돈을 탕진하였습니다. 그 무렵 그 지방에 크게 흉년이 들어 아들은 아주 궁핍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지방의 주민 한 사람을 찾아가서 몸을 의탁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아들을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했습니다. 그렇게 긴 세월 개고생을 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다 다행히 제정신이 들어서 아버지에게 돌아갈 생각을 했습니다. 아버지에게 돌아가서 이렇게 말씀드리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 제가 아버지께 큰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더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으니 저를 품꾼의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하지만 돌아온 아들을 반가이 맞아들인 아버지는 크게 기뻐하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대로 탕자의 비유 혹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삶이 이런 경로를 거쳐 펼쳐진다는 사실을 알려 주시기 위해 이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아버지의 집은 천국을 상징합니다. 물론 아버지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아버지 집을 떠나 먼 지방으로 간 것은, 인간이 영으로서 천국에서 살다가 천국을 떠나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이런 물음을 갖게 됩니다. 천국에서 잘 살면서 왜 천국을 떠나 살고 싶은 생각을 하였을까 하는 겁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추측이 있지만, 특별한 이유 없이 그저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는 것이 가장 유력한 답입니다. 일종의 호기심 같은 것이 생겨났다고 이해하면 됩니다. 그런데 천국을 떠난 순간부터 큰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것은 에고라는 것이 생겨나 아들을 꼬드기게 된 것입니다. 에고는 아들에게 아버지를 떠난 것은 아버지에게 불만을 표시한 거고, 그것은 아버지를 공격한 일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곧 아버지에게 큰 죄를 지은 거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공격당한 아버지는 보복 공격을 가할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믿은 아들은 방탕하게 살면서도 죄책감과 두려움을 품고 살았습니다. 나중에 제정신이 들어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을 때 그가 생각한 내용을 보십시오. 자기가 큰 죄를 지었고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는 존재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를 떠난 것을 큰 죄를 지은 거로 생각했다는 뜻입니다.

  얼마 전에 사람들의 생의 목표가 둘 중의 하나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첫 번째는 이 세상에서 행복을 이루는 것이고, 두 번째는 천국으로 돌아가서 천국에서 진정한 행복을 이루는 것입니다. 방금 말씀드린 탕자의 비유에서 아들은 바로 첫 번째 목표로 산 것입니다. 많은 재산을 갖고 방탕한 생활을 한 것이 그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다 재산을 탕진하자 그 지방의 주민을 찾아가 그에게 의탁하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여전히 이 세상에서 다른 탈출구를 모색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다 제정신이 돌아오자 비로소 아버지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두 번째 목표로 바꾼 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집에 돌아가기 전까지는 늘 죄책감과 두려움을 품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상을 전제로 하여 오늘 본문을 보겠습니다.

  요셉과 그의 형제들이 야곱의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르고 이집트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형제들이 아버지가 죽었기 때문에 요셉이 자신들에게 당한 온갖 억울함을 앙갚음하면 어찌하나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요셉에게 전갈을 보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유언을 남겼는데 아우님께 전하라고 했다는 겁니다. 곧 형들이 몹쓸 짓을 했지만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해주기 바란다는 내용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곧이어서 직접 요셉을 찾아가서, 엎드려서 “우리는 아우님의 종입니다.”라고 말하며 용서를 빌었습니다.

  형들은 요셉이 보복할지 모른다고 두려워하고 있는 겁니다. 형들이 요셉을 죽이려고 하다가 상인에게 팔아버린 사건은 39년 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런데 형들이 이집트의 총리가 된 요셉을 만났을 때 이미 용서받았습니다. 그때로부터 17년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용서를 믿지 못하고 여전히 보복을 두려워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형들의 죄책감이 굉장히 깊었고 그로 인한 두려움이 엄청났던 겁니다.

  죄책감은 반드시 두려움을 갖게 만듭니다. 죄책감은 상대방에게 죄를 지었다는 생각에서 비롯되는데, 죄를 지으면 벌을 받게 된다는 생각을 반드시 하게 됩니다. 그리고 벌을 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죄책감과 두려움은 언제나 한 짝으로 작동합니다. 이러한 죄책감과 두려움은 불행의 가장 큰 원인이 됩니다.

  우리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죄를 감옥에 갈 정도의 행동으로만 이해하면 안 됩니다. 모든 공격이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게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공격의 형태는 아주 다양합니다. 물리적 폭력은 물론이고, 마음 차원에서 갖는 미움, 시기, 원망, 분노, 판단 등입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사랑이 아닌 것은 모두 공격입니다. 어떤 경우 자신이 상대방을 공격한 건지 확실히 알 수 없을 때, 상대방에게 사랑을 느끼거나 전했는지를 보는 겁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공격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현재 우리의 수준으로는 공격하지 않고 인생을 살아갈 수 없으니, 우리는 늘 죄책감을 느끼며 살아가게 됩니다. 또한 그로 인한 두려움을 느끼며 살아가게 됩니다. 성자에 경지에 이른 사람을 제외하고 전 인류가 죄책감과 두려움을 품고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인생이 행복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매우 중요한 사실을 한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설령 상대방을 공격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무의식 아주 깊은 곳에는 죄책감과 두려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학적으로 말하는 원죄 의식과 비슷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곧 자기가 하나님을 공격했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모든 인간이 하고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공격했다고 생각하니 하나님께 죄책감을 느끼는 겁니다. 또한 나한테 공격받은 하나님이 내게 보복 공격을 가하실 거라는, 역시 터무니없는 생각에서 비롯된 두려움을 갖고 있는 겁니다. 그 죄책감과 두려움이 모든 인간의 가장 깊은 무의식에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예수님이 탕자의 비유를 통해 설명하신 겁니다.

  탕자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감으로써 해피엔딩을 맞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해피엔딩을 맞지 못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첫 번째 목표 곧 세상에서 행복을 이루는 목표로 살아가고, 또 어떤 사람은 두 번째 목표 곧 천국으로 돌아가서 천국에서 진정한 행복을 이루는 목표로 살아갑니다. 아마도 전자의 숫자가 후자의 숫자보다 훨씬 많을 겁니다. 그리고 우리의 깊은 무의식에는 죄의식과 두려움이 가득합니다. 그 점에서는 전자나 후자나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부터는 두려움에 관해서만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 두려움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보복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 두려움이 시시때때로 의식의 수면 위로 올라옵니다. 본문에서 형들이 요셉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요셉에게 용서를 빌었다고 했습니다. 17년 전 요셉은 형들을 용서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형님들이 나를 이곳에 팔아넘기긴 하였습니다만, 그것은 하나님이 형님들보다 앞서서 나를 여기에 보내셔서 우리의 목숨을 살려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형님보다 앞서서 보내신 것은, 하나님이 크나큰 구원을 베푸셔서 형님들의 목숨을 지켜 주시려는 것이고, 또 형님들의 자손을 이 세상에서 살아남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나를 이리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모든 일이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어서 형들 모두와 입을 맞추고 부둥켜안고 울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17년 동안 형들의 식솔들까지 이집트 땅으로 이주하게 하여 풍족하게 살도록 돌봐주었습니다. 그런데 형들은 하나님에 대한 굳은 믿음에서 비롯된 요셉의 용서를 믿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지극한 은혜를 받았건만 여전히 요셉을 믿지 못하고 두려워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두려움은 상식적으로 볼 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두려움을 그들의 무의식 깊은 곳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보는 겁니다. 그 두려움이 요셉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가면을 쓰고 나타났다고 보는 겁니다. 그들이 요셉을 두려워하는 것 같지만 실은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겁니다. 여러분이 이 원리를 이해하기 어려우시겠지만, 성령의 도움을 통해 이해하실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느끼는 모든 두려움은 실은 무의식 깊은 곳에 뿌리내리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하나님께 두려움을 느낀다는 점에서 무신론자도 예외가 아닙니다. 불교신자도 예외가 아닙니다. 다만 그 하나님은 사실 다수의 기독교인이 믿는 하나님과 꽤 다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믿는 하나님과 다수의 기독교인이 믿는 하나님이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다수의 진보적 기독교인이 믿는 하나님은 정의의 이름으로 악을 심판하고 분노하는 분이지 않습니까? 다수의 보수적 기독교인이 믿는 하나님은 절에 불을 지르는 것을 허용하고, 성 소수자 보호를 반대하는 분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이 믿는 하나님은 그런 다수의 기독교인이 믿는 하나님과 다릅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의인과 악인을 정확히 똑같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악에 대한 분노나 심판을 전혀 모르시는 하나님입니다. 아무튼 분명한 것은 그 하나님은 절대자이시고 창조주이시라는 겁니다. 무신론자도 창조하시고 불교신자도 창조하신 분입니다. 당사자들은 그 사실을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테지만 말입니다. 어쨌든 그런 존재가 계십니다. 그 존재에 대한 두려움을 남녀노소 전 인류가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어떤 상황이 도래하면 그 두려움이 가면을 쓰고 올라옵니다. 요즘 같은 코로나 국면에서는 코로나에 감염될지도 모른다는 가면을 쓰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올라옵니다.

  그 두려움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우선 그 두려움이 터무니없는 거라는 사실을 아는 겁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공격했다는 생각이 착각이고, 그래서 하나님이 보복 공격할 거라는 생각이 착각입니다. 하나님은 태초로부터 영원토록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을 믿으며 조금씩 두려움을 지워나가는 작업을 하는 겁니다. 그 두려움이 줄어드는 것에 비례하여 우리가 세상에서 느끼는 두려움도 줄어들게 됩니다. 코로나 감염에 대한 두려움도 줄어들게 됩니다. 코로나 감염이 두려워 교회에 오는 것이 꺼려지는 분이 있습니까? 실은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 두려움을 줄이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노후의 경제적인 문제에 대해 두려워하는 분이 있습니까? 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 두려움을 줄이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치매에 걸릴 것에 대해 두려워하는 분이 있습니까? 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 두려움을 줄이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 밖의 모든 두려움이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온갖 두려움의 근본 원인은 하나이고, 그 해결책도 하나입니다. 곧 세상을 살아가면서 갖게 되는 다양한 두려움의 근본 원인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고, 그 해결책은 단 한 가지 하나님이 나를 절대적으로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온전히 믿는 것입니다.

  눈 내리는 산길을 버스가 가고 있었습니다. 가파른 고개가 나타났습니다. 눈이 더 많이 내리는 거 같았습니다. 사람들은 마음을 졸였습니다. 잘못되면 산 아래로 미끄러집니다. 차 안에는 적막감이 감돌았습니다. 그렇게 긴장된 시간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누군가 코를 골며 자는 소리를 냈습니다. 사람들이 코 고는 쪽을 돌아봤습니다. 열두 살 정도 된 사내아이가 자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무사히 고개를 넘었습니다. 사람들은 안도하며 비로소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 아직도 자는 소년을 깨웠습니다. “얘야, 우리는 엄청난 고개를 넘어왔단다.” “알고 있어요. 여차하면 큰일 나지요.” “너도 알고 있었구나. 그런데 어떻게 잠을 잘 수 있었니?” 소년이 대답했습니다. “이 차의 운전기사는 제 아버지랍니다.”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하였지만 소년이 태평스럽게 잘 수 있었던 이유는, 우선 아버지의 운전 실력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버스에 타고 있으니, 아버지는 실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안전하게 운전하리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겁니다.

  인생이라는 것이 눈 내리는 산길을 버스를 타고 가는 것과 비슷하다고 하겠습니다. 수시로 두려움으로 마음을 졸이게 됩니다. 이런 인생을 살아갈 때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권능에 대한 신뢰가 필수입니다. 그 신뢰를 위해 두려움을 느낄 때마다 그것이 하나님을 두려워함에서 비롯됨을 알아차리는 겁니다. 이어서 나를 한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그 두려움을 내맡기고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느끼려고 하는 겁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일과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하는 일이 같은 효과를 냅니다. 그래서 수시로 하나님께 “I love You”라고 속삭이며 미소 짓는 습관을 기르는 겁니다. 여러분이 그런 훈련을 꾸준히 하여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씩 줄어들기 바랍니다. 그 결과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두려움도 줄어들기 바랍니다. 대신 하나님 사랑에 대한 믿음으로 평화롭고 안전한 삶 이어가시기 바랍니다. ❉

주님,
어떤 일로 두려움이 느껴지면,
재빨리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가면을 쓰고 나타났음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느끼려고 하는 습관을 기르게 도와주옵소서.
또한 하나님께 “I love You”라고 속삭이며 미소 짓는 습관을 기르게 도와주옵소서.
한편 우리는 두려움과 사랑 중 하나를 선택하며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두려움이 느껴지는 것은 형제에 대한 사랑을 외면한 일임을 인식하여
누구라도 한 사람을 떠올려 그를 축복함으로써 사랑을 전하는 습관을 통해
두려움이 사라지는 놀라운 경험을 자주 하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삶이 점점 가벼워지고 평화로워지고 사랑스러워지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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